2009년 10월 29일
용산 형사1심 판결, "법원"과 "법"의 역할이 고민스럽다.

1. 판결의 역할은 무엇인가? 갈등은 현명하게 종결되었는가?


<법도 '용산'을 외면했다.> 경향신문은 어제 저녁 인터넷 신문 대문에 이러한 제호를 내걸었다.

"사법부에 절망한다." 피고인들과 변호사는 분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판의 본질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재판의 미덕은 설득을 통한 분쟁의 해결이다. 악다구니 받친 사람들을 차분하게 앉혀 놓고서, 합리적인 이유를 조목 조목 따져주는 것이다. 민사소송 뿐 아니라, 특히 형사재판이기 때문에 설득, 설복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형법의 목적은 단순히 피고인을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피고인이 뉘우치게 만들고 유사한 잘못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1) 피고인들의 죄는 존재한다.

 판결에 대해 법원, 사법부에게 "이유"가 있었다.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애쓴 아시아경제 신문기사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1심 판결 내용을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법원은 농성자들의 '특수공무집행 방해 치사상'ㆍ'업무방해' ㆍ'현주건조물 침입' 혐의 등 검찰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인정하고, 경찰 당국이 단순 민사분쟁에 특공대를 투입한 것은 정당한 조치였다고 판단했다."

법적으로 정리해 보면 피고인들의 각 죄(형법에서는 이를 '죄책'이라고 한다)는 다음과 같다.
  •  재개발 조합은 적법하게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피고인들이 건물을 무단으로 점거했다. "업무를 방해"한 죄인 것이다. 
  •  재개발 대상 건물이었지만 관리되고 있는 건물이었는데, 피고인들이 무단으로 건물에 침입했다. "현주건조물 침입"죄인 것이다. 
  •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화염병 등을 투척했고, 경찰공무원이 공무수행중에 상해를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특수공무집행 방해 하였고 그 과실로 사망이나 상해에 이른" 죄인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법문"에 비추어 판단하고, 그 결론으로서 '죄'를 인정하는 것은, 1차적인 법원의 역할이고 법원이 없는 죄를 있다고 하거나, 있는 죄를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원은 법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을 집행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밝혀지는 사실 자체를 법에 '포섭'하는 과정을 통해 죄책을 매길 수 밖에 없다.

(2) 그러나 양형은 어떠한가?

 하지만 양형의 측면에서라면 법원의 자유로운 활동의 폭이 넓어진다. 하지만 양형에서 법원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찰과 철거용역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무런 피해보상을 하지 않은데다 정치적 목적으로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등 범죄 후 정황도 좋지 않아 중형이 불가피하다"

 말하자면 죄도 있지만, 특히 그 '죄질'이 나쁘다고 법원은 피고인들을 단죄, 비난 하고 있는 것이다.

(3) 법원은 법에 대해 무슨 역할을 맡는가?

나는 이 판결에 대한 소개와 여러 분노와 갈등을 목격하면서, 법원의 역할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 법원은 사악한가?


법원은 법을 법대로 집행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1심 판결 이후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형태 변호사는 “법리만 따지면 99% 무죄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유죄가 나왔다”며 “사법부가 자기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밑줄은 필자)

 그러나 과연 이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99% 무죄로 확실했는가? 사법부는 법리를 완전히 곡해했는가?
 
 나는 이에 대해 '그것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사법부가 명백한 일을 그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99% 무죄일 사건이라면, 검찰의 기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우선 이러한 변호인의 감정적인 분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변호인들의 분노로부터 거리를 둔다고 해서, 법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판부는 "아무리 절박해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공무집행 중인 경찰을 향해 위험한 화염병을 던진 것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로 법치국가에서 용인될 수 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아마도 재판부의 생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 인용이 아닐까 싶다. 경찰은 법대로 집행했을 뿐이다. 재개발 조합도 법대로. 건축주도 법대로 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법을 어긴 것인가?" 이 참사의, 이 비극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법원은 그건 역시 법을 어긴 너희, 피고인들 아니냐는 답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절박해도, 법에 호소하라.는 논리를 세운 판결이었다. 불법을 보호해주지는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이다.

* 법원은 정의로운가? 혹은 현명했는가?

 재판부의 태도는 일견 이치가 맞는 것 같다. 많은 보수논조의 신문들 역시 이러한 태도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례로 국민일보는 제호로 "용산참사 중형선고… 폭력적 시위문화 ‘단죄’" 라고 말한다.

 법원이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체 사회와 그 속의 제도-강제력-으로서 '법'에 대한 역할을 맡지 않고,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사실 속에서만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우리 1심 법원은 왜 이런 참사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그러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시너'를 뿌려서 누가 '화재'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사실 문제는, 피고인들에게뿐 아니라 국민의 절대 다수에게(즉 공중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당황한 세입자나 전철연 소속원이 그랬을 수도 있고, 반대로 용역이 그러했을수도 있고, 경찰의 실수였을수도 있다. 게다가 용산참사의 경우, 그 책임소재는 검경의 수사기록 불공개와 함께 불분명하게 되었다.

 재판은 정말 무엇을 판단해야 했는가? 
 
 추운 겨울. 새벽. 경찰이 진압을 시작한다. 테러리스트 진압을 위해 훈련받은 경찰특공대가 공중에서 뛰어내린다. 전철연 및 시위대는 화염병과 새총으로 반격한다. 야만과 야만, 불법과 불법의 충돌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화염이 터져오르고,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고 다친다. 대체 이 비극은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나? 이 문제를 어디에서 부터 풀어나가야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는가? 

 똑바르게 물어서, 과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재판부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왜 그들을 망루로 올라갔는가?"
 법원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질문 없이, 앞 뒤의 사실을 모두 자르고. 단지 그날. 그 시점. 그 경찰의 공무와 그 용역업체의 행위 1, 2, 3번과. 그리고 화염병 투척 행위 1번, 2번, 3번. 피고인 갑 그리고 피고인 을. 의 "죄책을 논하라" 는 게 가능한가? 법원은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과연 가능한가? 과연 우리는 그 망루의 의미를 따지지 않고, 판결을 낼 수 있을 것인가?

 법원은 법을 만들 수 없다. 법은 입법자가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법원은 침묵할지언정, 불법을 말할 수는 없다. 법이란, 상식과 조리의 소산이며, 경험칙의 산물이다. 법(이른바 '法源')의 단말 하나하나. 즉 법전의 조항 하나하나는 입법자의 헐거운 작업에 의해 짜여졌지만, 그 사이를 엮어 내려가는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들은(이는 단순한 기계적 인과관계 판단은 아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 그 자체에서 그 근원을 끌어오는 단단한 것이다.

 법원은 법을 만들수는 없으나, 법을 적용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법원은 마땅히 넓게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 공판장의 의미란 아마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억울하고 갈등하고, 피와 죽음과 복수와 복수를 부르는 이 얽힌 관계에 대한, 한바탕의 한풀이가 바로, 재판이 아닐까? 너는 (억울한) 사실을 내게 말하라. 나는, 즉 법원은 '법'을 주리라. 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의 요청이 아닐까? 과연 현재 1심 판결의 '소극'으로서, 무엇이 만족될까? 법원은 입법자에게 가서 항의하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억울함과 갈등을 이처럼 칡뿌리처럼 얽혀 놓은 판결이, 판결 그 자체의 핵심적 미덕으로서 "현명함"에 이르렀는지 나는 의문이다.


 


2. 법원의 법에 대한 역할은 무엇인가? 먼저, 법은 공정한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문제는 '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권리금의 문제, 도시정비법 등 재개발 관련 법규들의 난맥상 문제 (이는 기사에서 자주 논해지는 바이다.), 건축의 고질적인 복잡한 2중 3중의 하도급 관계. 지나친 부동산 가격과 그를 통한 경제 부흥의 문제. 등등.

 결국 '법'은 사회와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강제력 있는 제도의 묶음이다. 그러나 사회에는 부정의와 악이 존재하고, 우리의 법도 그 모든 것들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법전, 즉 입법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法文은 부조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계속해서 다듬어 나가야 할 대상이겠지만, 궁극적으로 법이 약자의 편은 아니다.

 법에 대한 투쟁은 소중하다. 그것을 법원은 촉진까지는 아니어도,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입법자의 영역에 법원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하지만 법원이 잔혹할 수는 없고, 그 판결이 억울함을 남길수는 없다. 법원으로서는 고민이고 또 고민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법원은 법을 고양시키는 데 그 책임을 다 하면 될 뿐이라면. 우리의 법원은 단지 행정부나 입법부의 역할을 감시하고 있으면 될 뿐이다. 그들로 하여금, 법을 만들게 하면 된다. 국민으로 하여금, 입법자를 압박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대체 법원의 역할은 무엇인가?
 
 법원의 역할이 부정의한 법을 지킴으로써, 국민들을 분노케 만들고 입법부를 압박해 정의로운 법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법원의 역할은 "불의의 법이라도 그대로 고수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법원의 태도와 윤리인가? 법원은 사회에 대해 눈 감아도 괜찮은가? 나아가 법원은 법에 종속 될 뿐인가?

 궁극적으로 왜 우리는 법원의 재판을 허용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소수자, 약자, 그리고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원의 역할이 분명히 따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나는 법원의 역할은 '합리성'이라고 생각한다. 법학이 말하는 이른바 'Legal Mind'라는 것도 그것이라고 본다. 이치 있는 판단 그 자체가 바로 법원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 '이치' '조리' 는 단순한 재판의 부속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실을 법에 맞춰 나가기 위해 동원하는, '인과관계 판단'에 그치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시너통이 45도로 기울어져서, 확률상 그 시너가 1초 후에 떨어져서, 다시 가연성이 강한 물체여서, 옷깃이 스치는 '스파크'만으로도 점화하고 폭발할 수 있다는 등의. 이러한 판단은 기초적이고 하등한 논리학에 불과하다.

 진실한 '논리' '이치' '조리' 의 힘은, 그것이 부정의한 법조항(법문)을 정의로운 공판장 앞에서 적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데서 발휘된다. 그리고 그 힘은, 사회와 그 경험칙을 폭넓게 법해석에 적용할 때 기능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망루에 올라갈 수 밖에 없었는가?" 

 법원은 재판기계가 아니다. 300원을 넣으면 자판기 커피가 나오지만, 사실을 넣으면 재판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넣어도 넣어도, 법원은 더 넓은 사실을 스스로 탐구하고 묻고 대답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마땅하다. 법원은 책임을 전가하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다. 누가 문을 두드리면 겨우 빼꼼히 문을 열고서는 대답을 해주는 얼치기가 법원이어서는 곤란하다. 법원은 정의의 수호자여야 하고, 거리의 피난처로 자처해야 한다. 
 
3. 법원의 힘과 지혜

 법원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진정으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싸우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재판이 있는 것이고, 이 때문에 법원에게 '양형' 등의 폭넓고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재량'이 있는 것이다. 법원에게 힘이 주어진 까닭은 시너가 누구에 의해 불붙었는가를 따지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법원은 그 힘과 지혜로, 그 스스로 가능한 최대한의 시야 속에서 무엇이 진정한 갈등의 본질인지를 따지고. 논하고. 그리고 그 얽힌 실타래를 끊어서 모두가 회한의 그러나 승복의 눈물과 웃음을 흘리며 집에 돌아가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모두가 다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함이다. 용산참사에 대해, 우리 법원은 과연 모두에게 다시 행복할 기회를 주었는가? 피고인들에게 뿐 아니라, 경찰에게도. 용역에게도. 청와대에게도. 그 누구에게든지 말이다. 가만히 묻고 따져 볼 일이다.
 
*  한국 위키피디어의 용산참사(중립적인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항목은 여러 소개를 많이 해 주어서 참고가 되었음을 밝힌다.
by Meta-David | 2009/10/29 22:09 |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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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카 at 2009/10/30 02:40
뜬금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고맙다. 이런 글을 볼 수 있게 해 줘서. 네 덕분에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어.
Commented by zerose at 2009/10/30 09:16
요즘 사법부는 이거죠.
-우리는 단지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뿐입니다-
Commented by Meta-David at 2009/11/09 17:14
신명규님 죄송합니다만. 본 블로그의 주인으로서 저는, 욕설이 들어간 덧글이나 제 글과 관련 없는 덧글은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Meta-David at 2009/11/09 17:15
이카. 고마워 ^^
zerose님. 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또 나름대로 과중한 업무를 이겨내면서 성실을 다 하는 단독판사들도 계시답니다. 어쩌면 시스템이 문제라고 해야겠죠. 오랜 변명이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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