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이란 굉장히 사치스러운 운동이다. 그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몸을 가꾸기 위해서는 좋은 피트니스 클럽에서 제대로된 트레드밀을 30분동안 달리는 편이 낫다. 정신 수양을 위해서도, 쌓인 책을 읽는 편이 옳다. 움베르토 에코가 말하듯이, 우리에게는 읽을 시간이 도무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책을 나섰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의 긴 노을을 여유있게 감상하면서 말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사는 동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안의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때부터, 사실 왠만한 일로는 학교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나에게는 학교 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이 다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나갈 때는, 그래도 나의 여행이 운 좋게 기회를 만난 셈이다. 나는 할 일이 있어 사회로 복귀했다는 태도로, 당당히 어깨를 들고서 지하철도 타고 사람들과 눈짓도 주고 받을 수 있다. <날개>에서 이상이 고백했던가. 올바른 목적을 지니고, 난 번화로를 내딛는다.
하지만 산책. 이라는 이름의 목적 잃은 여행은, 매우 사치스럽고도 고독하다. 마치 잠시간의 목적 없는 휴가를 허락받는 해묵은 군인의 모양이다. 환영하는 이도 돌아갈 생각도 없다. 나는 순전한 관찰자가 되기 일수여서, 길 위에서 자칫 방황해버린다. 사람들과 눈짓을 나누기보다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내 속의 시커먼 경멸을 발견해 버린다.
어쨋든 나는 다시금 사람들 사이로 내려가기로 했다. 무어- 짜라투스트라와 같이 행여나 내가 계시라는 묶음을 지니고서 이 山을 내려간 것도 아니다. 그저, 그저 걷기 위해 내려갔고. 보기 위해 시장이 있는 거리를 향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로 향하는 길에는 작은 산과, 그 산을 통해 있는 정말 짧고 작은 터널이 있다. 터널의 양 편으로 인도가 어설프게 마련되어 있는데, 나는 웅웅 거리며 내 곁을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음 때문에 소름이 끼친다. 뒤에서 다가오는 차가 내는 굉음이 작은 터널 속에서 울리다 보면, 흡사 무슨 탱크라도 나를 노리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어둠 저편에 있던 무슨 괴물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괴성인지도 모른다.
무사히 터널을 통과하면 신세계이다. 터널은 참 매력적이어서, 나는 일부러 차들의 꾀죄죄한 소리를 굉음으로 상상하고, 마침내 나의 통과의례를 위한 고통으로 作爲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한 신세계라는 느낌. 터널을 지나고 나면, 이제 학교의 풍경이 일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아이들의 난동과, 주름이 깊게 파인 남자 여자들의 발걸음. 분주함은 혼란 속에서 흩날리는 풍경으로 펼쳐진다. 뿌옇다 못해서 흐리고 텁텁한 공기는, 매우 덥게 느껴진다. 여름 밤의 축축하고 뜨뜻한 대기가 그들의 코에서, 그리고 저 아줌마와 저 아이와 그리고 내 코를 통해 끊임없이 쉭쉭거리며 왔다 갔다 한다. 나는 순간 어떤 감정을-그리고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돈스럽다.
터널을 나와 비스듬한 거리를 아래로 내려오면서, 나는 많은 집들을 본다. 더운 날씨에 어쩔 수 없이 집안까지 휑히 비취는 날이다. 저녁 시간이고 많은 이들이 집안에 머물고 있다. 어둡고 티비가 켜져 울룩둘룩 색이 변하는 창문들. 왠 사람들이 북적이며 술장단을 노니는 집안 풍경이 보인다. 집이 아닌, '집들'은 큰 콘크리트를 단위로 조그맣게 제 자리를 비집고 차지하느라 힘겹다. '아파트'
'아파트'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언젠가는 내가 살아왔던 '아파트'들을 소재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 '가든 빌라' '행운 아파트' 등의 속을 비춰보니, 어찌 피하지도 못할 어색함에 휩싸여, 내가 살아왔던 공간이 저들의 공간인가 라고 어지럽다.
저 치열하고 뜨뜻한 생활의 콘크리트 투기장이여.
집들은 제 각기 어찌나 치열하게 제 자리를 찾아서 콘크리트, 아아 바위 덩어리들을 쌓고 또 파 왔던지. 그 속에 머무는 가족들은 얼마나 제 각기 행복하고 그리고 불행하던지. 그들은 빨래를 널고, 찌개를 끓이고, 아이를 키운다. 왠 아저씨 아줌마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서, 행복하다는 듯이 다가선다. 나는 어찌나 흠찟 놀라는지.
대여섯 층이 되는 작은 '빌라' 라는 데 끼워진 집들은, 인간냄새로. 살 냄새로 가득했다.
공기가 터질듯이 답답했다. 내 미래를 그릴 수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기 혐오로 가득해졌다.
내가 저 공간을 통해 자라왔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의 뿌리는 콘크리트와 투쟁한 저 아파트와, 저 나이든 여자의 주름팍과 그 여자의 빨래와 그 쉰내 속에서. 그 여름날의 역겨움 속에서 자라왔다. 나는 다시 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이 질문만은 나에게 묘한 희망감과 또 다른 환멸을 안겼다.
<시편>에서는, 거리 곳곳에서 지혜가 너를 부른다고 말한다. 나는 때로 거리전도사의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바로 이 '지혜'인가 하고 반문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때까지 그 구절에 대해 무슨 큰 회의를 품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이 거리에서, 나는 참 큰 의문과 반감을 가지고서는 여러번 힐난하듯이 물었다. 이 거리에서 도대체 무슨 지혜를 찾으라는 말인가. 이 생의 지옥 속에서, 이 삶의 투쟁들 속에서 이 낱낱한 생활의 일순 일순의 땀내 속에서 무슨 지혜를 도대체 내게 목도하라는 말인가. 하고 나는 나를 향해서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을 장저와 걸닉에 반대하는, 공자에게서 길어 낼 것인가?
우리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고 공자를 변호했듯이. 나도 이 거리의 지혜라는 것을 변호할 것인가? 변호할 수 있는가?
이 거리의 삶은 지혜에 있어서 무죄인가?
번잡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다시 번뇌같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치를 떨면서, 발길을 옮기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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