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희망은 없다> 충남대학교 신문 6월 8일자에 기고된 김용민 교수의 칼럼은 많은 반향을 몰고 왔다. 칼럼의 요지는 "너희(20대)처럼 처신하면 밥되기 딱 좋다" 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명박이 너희를 무시하지, 등록금 공약도 안 지키고.'라는 것이다.

나아가 김용민 교수는 "이미 너희(20대)는 뭘 해도 늦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지금 10대에게 큰 기대를 건다."는 마무리는 20대에 대한 실망과 질책의 감정을 보여준다. 어쩌면 '절망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동네북' 돼버린 20대를 위한 변명>은 83년생 한윤형 기자가 김용민 교수의 칼럼에 답하는 모양새로 오마이뉴스에 기고된 8월 4일자 기사이다. 한윤형 기자는 "그래도 20대에게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비록'' 20대에는 "활동가"가 없지만, 그래도 20대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성하리라'라는 것일까?
그러나 20대에 대한 김용민 교수의 의견은 물론이거니와, 83년생 한윤형 기자의 절박한 '변명'은 20대를 올바로 파악한 결과가 아니다. 한윤형 기자가 20대를 '비판이 아닌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은 얼핏 현명한 답변인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심각한 잘못이 있다.
첫째로 김용민 교수의 기고문은 20대에 대한 비판도 비평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용민 교수는 20대에 대한 자신의 실망을 담아서 단지 '비난'을 가했을 뿐이다. 둘째로 한윤형 기자는 20대를 비평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기사는 20대를 제대로 비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IMF 시대를 거친 20대의 보수화가 사실 '보수화'나 '우향우'라기 보다는, '열린우리당의 몰락'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 점에서는 타당했다고 본다.
이에 아래에서는 필자 나름대로 김용민 교수의 비난에 답해보며, 한윤형 기자의 의견을 보충해보고자 한다.
과연 10대가 구세주일까?
김용민 교수는 촛불을 일으킨 10대가 나이가 들어 다시 위대한 민주당의 정신을 살릴 것이라고 믿는가? 김용민 교수는 지금 20대에게 '데모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0대에게 희망은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10대가 지금의 20대 대신 5년, 10년 뒤에 화염병을 386같이 들고 거리로 뛰쳐나올까? 과연 2020년 2030년에 제2, 제3의 6월항쟁이 지금의 10대에 의해 일어날까?
필자는 김용민 교수가 과연 현실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그러나 이 의문 이전에, 그 의견(비난)은 건전하지도 않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대결'과 '항쟁'으로 점철된 사회는 살기 좋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10대가 20대의 대안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대가 10대의 전조일 뿐이다. 10대는 20대가 될 것이고, 20대의 정치적 성향은 10대에게도 거의 다름없이 연속될 것이다. 김용민 교수의 10대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마치 압제받는 민중이 구세주를 찾는 것과 같아서 안타깝다. 하지만 '혹세무민'의 네 글자를 피해가기 어려운, 그의 의견은 지식인으로서 자격미달의 맹종이 되지 않을까.
이른바 '20대 강아지론(개XX론)'-20대 민중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라
생각해보면 이 '강아지론'의 발상과 출처는 이명박 현 대통령에게 권력을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좌파의 변명이다. 이는 논리라기보다는, 구차한 절규에 가깝다. 하지만 지난 정권의 유산이 부당하게 '박해'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민주적 정권교체의 결과이다. 민주주의는 늘 정권의 교체를 평화롭게 보장하는 데서 시작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면 좋든 싫든 민중의 대의(大義)가 현 정권에 들어 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읽는 기본이고 원칙이다.
다수 국민은(최소한 다수 20대는, '대다수'라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노동자 운동에 절대적 동감을 표하지 않는다. 실제로 노동자 운동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절대적 정의'가 아니다.
다수 국민은 인권도 중요하지만 경제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합법적인 시위가 아닌 불법적인 시위를 진압하는 일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불행하지만, 필요하다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 반면 김용민 교수는 '불법집회'를 가지 않겠다는 자신의 학생들이 '까칠'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 20대에게 김용민 교수는 무엇을 바라는가? 쌍용차 공장의 대치 상황이 21세기 20대 VS 이명박 정권 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올바른 대한민국의 미래란 말인가? (필자는 쌍요차 대치 상황, 노사정 어느 편을 드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또한 좌파는 이명박 정권이 민중을 '속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라면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은 민중에게 언제나 신실했는가? 깨끗했는가? 도덕성 경쟁으로 나갈 때 과연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결코 이명박이 좋다거나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명박을 비판하길 원한다면, 제대로 비판하라는 것이다. 정치적 식견과 건전한 판단(;良識)을 갖추고 비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꿎은 20대를 굴욕감의 볼모로 삼고 함부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20대에게 감히 '희망이 없다'고 모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니 팔뚝 굵다'고 하는 김용민 교수의 칼럼은 '글'이라기보다는 '욕설'로 읽힌다. 그 칼럼은 현 정국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20대 민중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로 풀어낸 엘리트주의자의 절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를 규정짓지 말라. Do Not Judge Anybody- 민주주의로 충분하다.
이미 한국 사회는 다원화되었다. 공장노동자들이 여성을 옹호할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성소수자를 옹호할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가 환경운동가를 지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이 우파가 되어 해병대를 지지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 여성은 똑똑할 수 있다-이를 인정하라. 성소수자가 새만금 사업을 지지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 성소수자는 '개새끼'라거나 '딱 밥되기 좋다'고 비난받을 만큼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는 우파와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 자본가와도 '연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정짓고, 규정짓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만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제 각기의 이해관계자들이다.
삼성의 이사진은 삼성의 비노조 정책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불법적 노조탄압이 사실이라면,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 말에 대한 허용과 불허용이 바로 법의 역할이다.) 반대로 현대차의 노동자 조합은 자신의 업무 처우에 대해 격렬하게 교섭할 사항이 있을 것이다. 여성은 자신이 유급의 육아휴직을 마땅히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투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의 장병은 불가피한 징병제 하에서 제대로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성산의 도롱뇽을 옹호하는 말도, 반대로 고속철도의 빠른 개통이 중요하다는 말도 모두 존재하고, 존재해서 타협에 이르러야 한다. 한국은 이미 다수의 이해당사자들로 꽉 차 있다. 그리고 이들이 합법적으로 말 할 수 있도록, 타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 '법'과 '정치'가 할 일이다. 어떤 이해당사자를 '개새끼'라고 규정짓고 적으로 삼는 게 '정치'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20세기 초 소비에트와 나치스의 정치였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21세기 한국의 정치는 아니다. 더군다나 한 세대를 모조리 비난하는 건, 언제나 그러했듯이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비난'일 뿐이다.
20대와 21세기 플래쉬몹 정치는 살아있다
정치는 누군가를 규정짓거나 비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20대는 다원화하는 한국 사회의 일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20대에는 좌도 우도 풍부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20대의 좌'라고 해서 무조건 새만금 사업에 반대하거나 현대차 노조를 옹호하지 않는다. 비폭력적이지만 남성우월주의적으로 보이는 '20대'들이 많을 수 있다. 20대는 좌와 우의 경계를 넘나들며, 규정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합법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움직여 나갈 뿐이다.
불법시위는 나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좋은 품질의 먹을 거리'에 대한 위협에는 항거한 것이 바로 촛불시위의 본질이었다고 생각한다. 10대가 방아쇠를 당겼는지를 모르겠지만, 촛불시위가 불타오른 데는 모든 민중의 힘이 있었다. 그 곳에는 유모차를 이끌고 나온 엄마와 아빠가 있었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었고, 디카를 든 20대들도 당당히 있었고, 그리고 펀드를 걱정하는 30대, 40대들도. 50대들도 풍부하게 있었다. 촛불시위는 좌파의 산물이 아니다. 20대가 좌파의 '개XX'가 아니듯이, 촛불시위도 좌파의 훈장이 아니다.

민중의 먹거리에 대한 플래쉬 몹(flash mob). 그것이 바로 촛불시위였다. 21세기 정치적 '연대'의 의미를 이보다 더 잘 드러내 주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원주의 속의 연발하는 플래쉬 몹. 그것이 정치이다. 우리 20대는 그 네트워크 속에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단단히 잘 붙어 있다. 나는 20대가 자랑스럽다. 20대에게 희망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