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문학, 노트

사람은 왜 자랑을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고, 그것 때문에 다툰다.
주먹질이 시작된다.


왜 자랑을 하는가?

내 친구는, 장황하게 말한다.
(참고로 내 선생님은 내가 그녀를 '장황'하다고 말했다고 하여 대단히 분노하였다.)


왜 자랑이 중요한가?
왜 그들을 자랑을 하는가?

그들이 무언가 낫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문법이나 세상의 어떤 지식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들은 어떤 가르치는 직분이나 은혜를 타고 났던 것인가?

나는 이해하더라도 공감하지는 못하겠다.
사람은 자랑과 관계 없이, 그 실제 모습이 판단되어야 마땅하고.
그 밖에 무엇도 아니다. 


자랑한다는 성질은, 스스로의 나약함 이외의 그 무엇을 드러내지 못한다.

남성지 글쓰기에 대한 몇 가지 짧은 생각 문학, 노트

1.

 나도 사사오입해서 서른에 즈음하여서일까, 지난 여름에는 왠걸 남성지 하나를 덜컥 사 버렸다.
"에스콰이어"라는 이름도 쌔끈한 책자였는데 그야말로 욕망에 충실한 그림동화였다.

 일단 알록달록하여서 '그림책'이었고, 대부분의 상품 사진 아래에 현기증이 날 듯한 가격이 아주 작고 연한 글씨로 솟구쳐 올라 있었기 때문에 '동화'였다.

스티븐 킹이 기고한 단편도 실려 있었지만, 번역이 너무나 미숙했다.

그 잡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이 책이 영어 번역에 너무 많이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예시이다.)
"알프레드, 당신이 내게 물은 조언은 참 흥미로웠어요. 재킷에 어울리는 태슬이 달린 로퍼가 어떤 것이냐는 어려운 질문이었죠."

2주일 정도가 지나고 나자 기숙사 사람들이 그 잡지를 화장실에서 즐겨 보았던 기억이 난다. 

 무척 생경하면서도 재미있는 독서였다. 그 후 나는 편견을 고쳐 먹고 이른바 '남성지'의 세계에도 관심을 기울여 보았다.
무어랄까, 참 표현하기 쉽지 않은 욕망의 촉촉한 혀놀림이랄까. 아니면 아주 잘 재단된 비단의 주름이랄까. 그러한 묘한 물랑-루즈-식의 분위기는 아련하면서도 이상하게 낭만적이었다. 

 더 이상 낭만 따위에는 기댈 수도 없는 현대인이 마지막으로 찾은 사창가와 같은, 그런 서글프면서도 중독성 있는 매력이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 어떤 글도 책도 정죄할 의도는 없었다.

2.

 시험이 끝나 여유가 있는 올해 초에도 책 하나를 주문하면서 "아레나"라는 남성지를 함께 구매해 보았다.
앞선 "에스콰이어"보다는 한국적이었고, 편집장의 말은 '문화'와 '지성'으로 잡지의 품격을 자랑하는 듯해서 인상 깊었다. 기대하는 마음도 덩달아 커졌다. (정확히는 빨간색 기사를 제외했다는 '자랑(?)'이었다.)

 그런데 이 잡지는 실망스럽게도 그렇게 깔끔하거나 잘 재단되어 있지 않았다. 편집장의 자랑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선 읽을 거리가 없었고, 재미 없는 특집으로 방대한 지면을 채웠다. 영화 잡지가 아닌데도 영화와 배우 얼굴을 기십 면에 나누어 채웠다.

 특히 잡지에서 광고와 기사를 구별하기가 간단치 않았고, 이는 많이 불쾌한 독서였다고 고백한다. 상당한 지면에서 나는 이 글이 전면광고로 보이는 기사형-광고인지 아니면 광고형-기사인지 생각해 봐야 했다.

 "September Issue"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Vogue"지의 연중 가장 중요한 9월호를 출간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지만, 특히 그림이 많은 대중잡지가 그냥 예쁜 사진들의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 
"한 권의 잡지는 어떤 이야기를 담아 내야 한다"고 안나 윈투어 편집장은 말한다. 그러니까 그 시즌의 패션, 유행, 그리고 변화를 주도해 나가기 위해 대중잡지는 아주 교묘하고 신중하게 사진들을 선택하고 나열한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하나의 잘 짜여진 각본이나 소설과 같다.

나는 "에스콰이어"나 "아레나"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내가 '기사'와 '광고'를 구분할 수 없었던 물음표의 정체였다. 
주관이나 뚜렷한 윤곽이 있다면- 독자를 위한 편안한 유도등이 있었다면 아무도 책 속에서 방황하지 않는다. 

3.

 미국식 글쓰기는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국 글쓰기는 그 중에서 몇 가지 교훈을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첫째가 잘 짜여진 구성(construction/ structure)에 대한 철저한 훈련이라고 본다. 
독자와의 명확한 대화를 위한 실용적인 글쓰기 훈련이야말로, 대단히 유익한 앵글로-색슨 식의 저력인 듯 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창의력이나 진실성 혹은 원본성(originality)이 상당히 손상되고 있지만, 아무튼 그들의 글쓰기는 그 나름의 매력과 힘이 있다. 미국 드라마나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기반에는 미국 글쓰기의 탄탄한 기초가 자리한다. 

 대중적인 글쓰기에 있어서 '그림책' 잡지의 비중은 매우 크다. 하지만 그림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책은 이야기 하는(narrative) 무언가이다. 그 속에 어떠한 잘 정제한 정신이 없다면 우리는 매우 허망하고 초점이 어긋난 기호덩어리만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돈과 욕망에 대한 자본의 솔직함에 매료될 때가 있다. 그 자본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아니다. 다만 자본을 잘 반영하는 글쓰기는 흔치 않게 타산이 맞는 인문학 노동인데다가 때로는 아주 날카롭게 시대를 고백하고 풍자한다.
하지만 그 솔직함을 전달하는 일은 참 녹록하지 않다.
좀 더 분발해 주길 바라는 마음, 2012년 잡지에 대한 나의 감상이다.

우산을 고치다 문학, 노트

녹차 한 잔이 끓던 와중에, 문간에 젖혀 두었던 장우산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아끼던 남색 우산으로, 플라스틱 손고리는 길쭉하고 구부러져 있고 원단은 비교적 견고하고 공단처럼 윤기가 있다. 또 싸구려 우산들과 달리 꽁지에는 금속으로 테두리를 해 두고 징까지 박아 튼튼히 마무리했다.

비싼 우산은 아니지만 나름의 추억이 어려 꽤 아끼고 쓰다듬고 사용했다.
몇 번의 장대같은 여름 비를 나와 함께 보냈을까. 아마 너댓번은 되었음직 하다.

처음 강남 대로에 발을 딛였을 때에는 우산 따위를 사올 여유가 있었으랴. 
몇 해는 족히 지나 이제 강남 대로의 골목 사이로 카레집이니 양서洋書 인쇄니 하는 가게들을 알게 되면서, 문득 기념처럼 내 손에 들어온 우산이었다. 

나와는 이제 두 번의 이사를 거쳐 세 번의 집을 함께 한 물건이었으니 꽤 애착했다. 
왜 그러한지 모르지만 쓸모없이 생기는 이 여유로운 감정이 썩 싫지는 않았다. 
마치 벨벳 감촉의 고양이 털을 가만히 쓰다듬듯이 -  그런 애정이 아주 흔치 않게 내가 지닌 물건에 깃들어 버리는 것이다. 선인들이 말씀하시는 도깨비 깃든다는 물건이 이러한 식이었을지.

과연, 이 사랑하는 장우산은 나와 몇 세밑을 함께 하고서, 차갑고 뜨겁고 습하고 우중충한 나날을 달래주었다.



아버지가 운남성이던가 사천성의 학회에서 받아오신 휴대전화 손고리가 하나 있었다. 고대古代의 원생동물이 중국 그 지역의 잘 나가는 관광 상품이었던 모양인지, 이상한 민달팽이처럼 생긴 금속제 고리였다. 언뜻 은빛으로 묵직한 물건이었다.

무언가 꽤 고상한 느낌도 있었다. 도대체 원생동물이라니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들어 역시 손놀이를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만져도 보고 손아귀에 잡아도 보고 따뜻하게 불어도 보고 또 뺨에도 얹어보았다.
다만 역시나 그 뿐이었고 더 이상 쓸모는 없었다. 더구나 휴대전화에 걸 자리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인지, 문득 나는 애착하는 장우산 손잡이 귀퉁이에 고리 하나가 비어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 은색으로 빛나는 휴대전화 손고리를 장우산에 맞추어 보았다.
'자칫 속물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에 앞서 이쁜 장식이 두 가지나 모여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기뻤다. 
게다가 그 때 나의 장우산은 더욱이 도깨비가 되었던 것이다.

곧 비 내리는 날 그 장우산을 들고서 쫙 펼쳤을 때의 그 느낌은 얼마나 뿌듯하던지 모른다. 장우산 고리에는 마치 이 물건은 내껏만인 마냥 아름다운 은색 장식이 종달종달 귀엽고 고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끔 손아귀에 넣은 장식은 차갑고도 묵직했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 장우산의 한 살이 엇나가 부러져 버리는 일이 있었다.
아마도 비바람이 세찬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기숙사 언덕을 넘으면서 지나치게 우산을 바람에 마주한 모양이었다. 

쇠 조각 두 개를 잇는 나사가 없어져 버렸고, 덕분에 두 쇠 조각은 하나의 살이 되지 못하고 그저 두 개의 삐쭉한 철 조각이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보관해 두던 많은 조그만 묶음용 철사들을 요리조리 이용해 보았다.
수리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몇 번의 비오는 계절을 나는 장우산을 만지작거리면서 잘 보냈다.


그런데 새로운 집으로 옮겨 오는 즈음, 다시 그 살이 나갔다. 이번에는 왜인지 불안하고 더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인지 도통 수리할 생각을 못하고, 창의를 발의하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저 문간에 여러 날 버려 두었다.

한참이 지난 후 이제 다시 어느 날 밤. 그러니까 오늘 밤, 나는 이 장우산에 대한 애정이 희미해졌음을 느겼다. 그리고 그 때서야 다시 치밀어오르는 이 애정을 도로 파헤쳐내었다. 그래서 다시 수리에 돌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 수리하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수 년까지는 아닐텐데 도대체 어떤 철사로 이어놓았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먼저 값비싼 전자제품 등을 살 때 선을 묶어 두었던 검정색 철사들 중에서도, 내가 좋아해서 아껴 두던 말랑말랑하게 잘 굽고 튼튼한 철사를 골라 보았다. 게다가 이 검정색 철사는 비교적 길쭉한 종류였다. 그러니까 이러한 묶음 철사 중에서는 유난히 귀하고 또 괜찮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나는 장우산을 아끼던 과거를 추모하는 겸 해서 아무래도 이 정도의 양품良品은 필요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철사는 두 철을 잇기에는 너무 두꺼웠다. 두 철 사이로 우산 살의 지탱살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 가운데 구멍이 너무 작았다. 나는 철사의 끄트머리를 날카롭게 꼬아서 넣어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힘들었다.

잠시 짜증이 나고 고민도 되던 참이었다. 꼭 아끼다가 잠시 버려둔 애인한테 공을 들이려 했는데 냉대를 받은 기분이었을까.

그 참에 우산을 이리 저리 흔들어보니 무언가가 뚝 떨어진다. 예전에 수리하였고 다시 끊어져 우산의 안폭에서 놀던 철사인 모양인데, 금빛으로 빛나는 조잡한 모습이 아무래도 빵집 봉지를 묶을 때 쓰는 싸구려 철사이다. 

이 금빛 싸구려 철사는 그 종류의 묶음 철사들 중에서는 아주 별로이다. 일단 짧아서 묶기에도 불편하고, 딱딱한 편이어서 손에 감기지도 않는다. 게다가 검정색 질 좋은 철사와는 달리 한 번 베베 꼬이면 제대로 다시 풀리지도 않는다. 통 모양이 예쁘지 않다. 게다가 철사 자체는 아주 실처럼 날카로워서 끄트머리에 찔리기 십상이다. 자칫 배도 아프지 않은데 손가락을 따는 일도 생긴다. 여러모로 귀엽지 않은 물건인데, 그래도 검정색 철사가 없거나 싸구려 물건을 묶어야 할 때는 요긴할 때가 있어 모아 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싸구려 철사가 뚝 떨어지다니. 내가 과거에 그렇게 이 우산을 아끼지 않았던가. 나는 왜 좋은 철사로 수리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여하한 하릴없이 문득 싸구려 금색 철사 하나를 새로 꺼내어서 우산의 구멍에 맞추어 보았다. 
그런데 이 금색 철사야말로 너무 좁은 그 지탱살의 구멍에도 쏙 들어가지 않는가.
그 때서야 나는 내가 왜 이 짧고 밉상이기까지 한 싸구려 철사를 - 오직 내가 실용을 위하여 보관해 둔 이 철사를 - 예전 수리에 사용했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 싸구려 철사, 그 얇고 날카로운 철사 가닥이야말로 나의 우산을 고치기에는 적합하였던 것이었다.


성공적으로 우산 수술의 봉합을 마치고 나서 나는 드디어 물건을 쫙 펴보고 완상玩賞하였다.

완상이란. 이 도깨비 놀음이란 무얼까. 딱 맞을 수 밖에 없는 싸구려 물건으로 제 기능을 살리고, 쓸모 없는 장식으로 아름다워지고, 그리고 제 민몸은 오래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아직은 쓸만 하고 아리땁다. 

나도 어느 언덕에서 이러한 완상놀음을 해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어느새 녹차가 두 번째 우러져 나온다. 색이 깊다. 오늘 밤은 깊도록 아끼는 우산을 쓰다듬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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