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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9일
1. 판결의 역할은 무엇인가? 갈등은 현명하게 종결되었는가? ![]() "사법부에 절망한다." 피고인들과 변호사는 분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판의 본질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재판의 미덕은 설득을 통한 분쟁의 해결이다. 악다구니 받친 사람들을 차분하게 앉혀 놓고서, 합리적인 이유를 조목 조목 따져주는 것이다. 민사소송 뿐 아니라, 특히 형사재판이기 때문에 설득, 설복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형법의 목적은 단순히 피고인을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피고인이 뉘우치게 만들고 유사한 잘못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1) 피고인들의 죄는 존재한다. 판결에 대해 법원, 사법부에게 "이유"가 있었다.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애쓴 아시아경제 신문기사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1심 판결 내용을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법원은 농성자들의 '특수공무집행 방해 치사상'ㆍ'업무방해' ㆍ'현주건조물 침입' 혐의 등 검찰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인정하고, 경찰 당국이 단순 민사분쟁에 특공대를 투입한 것은 정당한 조치였다고 판단했다." 법적으로 정리해 보면 피고인들의 각 죄(형법에서는 이를 '죄책'이라고 한다)는 다음과 같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법문"에 비추어 판단하고, 그 결론으로서 '죄'를 인정하는 것은, 1차적인 법원의 역할이고 법원이 없는 죄를 있다고 하거나, 있는 죄를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원은 법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을 집행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밝혀지는 사실 자체를 법에 '포섭'하는 과정을 통해 죄책을 매길 수 밖에 없다. (2) 그러나 양형은 어떠한가? 하지만 양형의 측면에서라면 법원의 자유로운 활동의 폭이 넓어진다. 하지만 양형에서 법원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찰과 철거용역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무런 피해보상을 하지 않은데다 정치적 목적으로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등 범죄 후 정황도 좋지 않아 중형이 불가피하다" 말하자면 죄도 있지만, 특히 그 '죄질'이 나쁘다고 법원은 피고인들을 단죄, 비난 하고 있는 것이다. (3) 법원은 법에 대해 무슨 역할을 맡는가? 나는 이 판결에 대한 소개와 여러 분노와 갈등을 목격하면서, 법원의 역할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 법원은 사악한가? ![]() 법원은 법을 법대로 집행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1심 판결 이후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형태 변호사는 “법리만 따지면 99% 무죄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유죄가 나왔다”며 “사법부가 자기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밑줄은 필자) 그러나 과연 이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99% 무죄로 확실했는가? 사법부는 법리를 완전히 곡해했는가? 나는 이에 대해 '그것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사법부가 명백한 일을 그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99% 무죄일 사건이라면, 검찰의 기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우선 이러한 변호인의 감정적인 분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변호인들의 분노로부터 거리를 둔다고 해서, 법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판부는 "아무리 절박해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공무집행 중인 경찰을 향해 위험한 화염병을 던진 것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로 법치국가에서 용인될 수 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아마도 재판부의 생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 인용이 아닐까 싶다. 경찰은 법대로 집행했을 뿐이다. 재개발 조합도 법대로. 건축주도 법대로 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법을 어긴 것인가?" 이 참사의, 이 비극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법원은 그건 역시 법을 어긴 너희, 피고인들 아니냐는 답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절박해도, 법에 호소하라.는 논리를 세운 판결이었다. 불법을 보호해주지는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이다. * 법원은 정의로운가? 혹은 현명했는가? 재판부의 태도는 일견 이치가 맞는 것 같다. 많은 보수논조의 신문들 역시 이러한 태도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례로 국민일보는 제호로 "용산참사 중형선고… 폭력적 시위문화 ‘단죄’" 라고 말한다. 법원이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체 사회와 그 속의 제도-강제력-으로서 '법'에 대한 역할을 맡지 않고,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사실 속에서만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우리 1심 법원은 왜 이런 참사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그러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시너'를 뿌려서 누가 '화재'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사실 문제는, 피고인들에게뿐 아니라 국민의 절대 다수에게(즉 공중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당황한 세입자나 전철연 소속원이 그랬을 수도 있고, 반대로 용역이 그러했을수도 있고, 경찰의 실수였을수도 있다. 게다가 용산참사의 경우, 그 책임소재는 검경의 수사기록 불공개와 함께 불분명하게 되었다. 재판은 정말 무엇을 판단해야 했는가? 추운 겨울. 새벽. 경찰이 진압을 시작한다. 테러리스트 진압을 위해 훈련받은 경찰특공대가 공중에서 뛰어내린다. 전철연 및 시위대는 화염병과 새총으로 반격한다. 야만과 야만, 불법과 불법의 충돌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화염이 터져오르고,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고 다친다. 대체 이 비극은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나? 이 문제를 어디에서 부터 풀어나가야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는가? 똑바르게 물어서, 과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재판부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왜 그들을 망루로 올라갔는가?" ![]() 법원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질문 없이, 앞 뒤의 사실을 모두 자르고. 단지 그날. 그 시점. 그 경찰의 공무와 그 용역업체의 행위 1, 2, 3번과. 그리고 화염병 투척 행위 1번, 2번, 3번. 피고인 갑 그리고 피고인 을. 의 "죄책을 논하라" 는 게 가능한가? 법원은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과연 가능한가? 과연 우리는 그 망루의 의미를 따지지 않고, 판결을 낼 수 있을 것인가? 법원은 법을 만들 수 없다. 법은 입법자가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법원은 침묵할지언정, 불법을 말할 수는 없다. 법이란, 상식과 조리의 소산이며, 경험칙의 산물이다. 법(이른바 '法源')의 단말 하나하나. 즉 법전의 조항 하나하나는 입법자의 헐거운 작업에 의해 짜여졌지만, 그 사이를 엮어 내려가는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들은(이는 단순한 기계적 인과관계 판단은 아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 그 자체에서 그 근원을 끌어오는 단단한 것이다. 법원은 법을 만들수는 없으나, 법을 적용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법원은 마땅히 넓게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 공판장의 의미란 아마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억울하고 갈등하고, 피와 죽음과 복수와 복수를 부르는 이 얽힌 관계에 대한, 한바탕의 한풀이가 바로, 재판이 아닐까? 너는 (억울한) 사실을 내게 말하라. 나는, 즉 법원은 '법'을 주리라. 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의 요청이 아닐까? 과연 현재 1심 판결의 '소극'으로서, 무엇이 만족될까? 법원은 입법자에게 가서 항의하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억울함과 갈등을 이처럼 칡뿌리처럼 얽혀 놓은 판결이, 판결 그 자체의 핵심적 미덕으로서 "현명함"에 이르렀는지 나는 의문이다. 2. 법원의 법에 대한 역할은 무엇인가? 먼저, 법은 공정한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문제는 '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권리금의 문제, 도시정비법 등 재개발 관련 법규들의 난맥상 문제 (이는 기사에서 자주 논해지는 바이다.), 건축의 고질적인 복잡한 2중 3중의 하도급 관계. 지나친 부동산 가격과 그를 통한 경제 부흥의 문제. 등등. 결국 '법'은 사회와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강제력 있는 제도의 묶음이다. 그러나 사회에는 부정의와 악이 존재하고, 우리의 법도 그 모든 것들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법전, 즉 입법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法文은 부조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계속해서 다듬어 나가야 할 대상이겠지만, 궁극적으로 법이 약자의 편은 아니다. 법에 대한 투쟁은 소중하다. 그것을 법원은 촉진까지는 아니어도,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입법자의 영역에 법원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하지만 법원이 잔혹할 수는 없고, 그 판결이 억울함을 남길수는 없다. 법원으로서는 고민이고 또 고민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법원은 법을 고양시키는 데 그 책임을 다 하면 될 뿐이라면. 우리의 법원은 단지 행정부나 입법부의 역할을 감시하고 있으면 될 뿐이다. 그들로 하여금, 법을 만들게 하면 된다. 국민으로 하여금, 입법자를 압박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대체 법원의 역할은 무엇인가? ![]() 법원의 역할이 부정의한 법을 지킴으로써, 국민들을 분노케 만들고 입법부를 압박해 정의로운 법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법원의 역할은 "불의의 법이라도 그대로 고수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법원의 태도와 윤리인가? 법원은 사회에 대해 눈 감아도 괜찮은가? 나아가 법원은 법에 종속 될 뿐인가? 궁극적으로 왜 우리는 법원의 재판을 허용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소수자, 약자, 그리고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원의 역할이 분명히 따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나는 법원의 역할은 '합리성'이라고 생각한다. 법학이 말하는 이른바 'Legal Mind'라는 것도 그것이라고 본다. 이치 있는 판단 그 자체가 바로 법원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 '이치' '조리' 는 단순한 재판의 부속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실을 법에 맞춰 나가기 위해 동원하는, '인과관계 판단'에 그치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시너통이 45도로 기울어져서, 확률상 그 시너가 1초 후에 떨어져서, 다시 가연성이 강한 물체여서, 옷깃이 스치는 '스파크'만으로도 점화하고 폭발할 수 있다는 등의. 이러한 판단은 기초적이고 하등한 논리학에 불과하다. 진실한 '논리' '이치' '조리' 의 힘은, 그것이 부정의한 법조항(법문)을 정의로운 공판장 앞에서 적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데서 발휘된다. 그리고 그 힘은, 사회와 그 경험칙을 폭넓게 법해석에 적용할 때 기능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망루에 올라갈 수 밖에 없었는가?" 법원은 재판기계가 아니다. 300원을 넣으면 자판기 커피가 나오지만, 사실을 넣으면 재판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넣어도 넣어도, 법원은 더 넓은 사실을 스스로 탐구하고 묻고 대답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마땅하다. 법원은 책임을 전가하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다. 누가 문을 두드리면 겨우 빼꼼히 문을 열고서는 대답을 해주는 얼치기가 법원이어서는 곤란하다. 법원은 정의의 수호자여야 하고, 거리의 피난처로 자처해야 한다. 3. 법원의 힘과 지혜 법원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진정으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싸우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재판이 있는 것이고, 이 때문에 법원에게 '양형' 등의 폭넓고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재량'이 있는 것이다. 법원에게 힘이 주어진 까닭은 시너가 누구에 의해 불붙었는가를 따지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법원은 그 힘과 지혜로, 그 스스로 가능한 최대한의 시야 속에서 무엇이 진정한 갈등의 본질인지를 따지고. 논하고. 그리고 그 얽힌 실타래를 끊어서 모두가 회한의 그러나 승복의 눈물과 웃음을 흘리며 집에 돌아가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모두가 다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함이다. 용산참사에 대해, 우리 법원은 과연 모두에게 다시 행복할 기회를 주었는가? 피고인들에게 뿐 아니라, 경찰에게도. 용역에게도. 청와대에게도. 그 누구에게든지 말이다. 가만히 묻고 따져 볼 일이다. * 한국 위키피디어의 용산참사(중립적인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항목은 여러 소개를 많이 해 주어서 참고가 되었음을 밝힌다.
2009년 10월 07일
삶이 치열하지만, 그 삶에 치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노트는 이에 대한 나의 작은 답변이다. 나는 바쁘고 꿈에서는 경쟁자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조급함은 의미 없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을 괴롭힌다. 나는 날카롭고, 사람을 다치기 쉬운 말을 내뱉는다. 이내 후회한다. 삶은 치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스치듯이 바라볼 이 뜨거운 삶을 나는 원했고 사랑한다. 하지만 삶이 나를 살게 하지는 않고 싶다. 어떤 조화나 균형. 이른바 '중용'의 문제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중용에 이르는 지혜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 나는 호메로스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서사의 행간에서 일상을 찾는다. 삶이 나에게 있어 즉자적이지 않기 위해서, 나는 삶을 대상화 하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구성력"있게 그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삶을 이야기로 나는 짜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을 스스로 구술해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 단계를 어느 이야기로 그리고 나는 그 주인공으로 등장해 보아야 한다. 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마도 내가 삶을 짜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생각한다. ... 추석에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펼쳐놓고 앉았었지만. 실존주의가 나의 답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속의 놀라움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고. 그 시기의 닮음에서도 많은 차이를 발견했다. 역시 시대는 변하고. 그 논리는 이름만 바꾸어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우리 곁에 있을 뿐이다. ... Pat Metheny 의 Song for the Boys. 2009년 08월 15일
산책이란 굉장히 사치스러운 운동이다. 그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몸을 가꾸기 위해서는 좋은 피트니스 클럽에서 제대로된 트레드밀을 30분동안 달리는 편이 낫다. 정신 수양을 위해서도, 쌓인 책을 읽는 편이 옳다. 움베르토 에코가 말하듯이, 우리에게는 읽을 시간이 도무지 부족하기 때문이다. 2009년 08월 05일
<너희에게 희망은 없다> 충남대학교 신문 6월 8일자에 기고된 김용민 교수의 칼럼은 많은 반향을 몰고 왔다. 칼럼의 요지는 "너희(20대)처럼 처신하면 밥되기 딱 좋다" 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명박이 너희를 무시하지, 등록금 공약도 안 지키고.'라는 것이다. 2009년 07월 09일
I
아는 선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21세기 초반의 대학가 사람들 답게 "로또"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디오-슈페리움 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오피스텔이 '우월'하더라고 전언(傳言)하면서, 이케아(IKEA) 가구를 채워 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형은, 정겹게도 "로또에 당첨된다면 인생의 모든 운을 거기에 써버리는 거 아닐까?"라는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똑똑한 척 재느라고 다시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운'이라는 거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다른 운들은 모두 재물운으로 바꿔볼래."하고 '운'의 종류를 云云했다. 형은 "건강운까지도 말야?"라고 응수했고, 역시 그건 무리겠지. 하고 나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II 잠시 지나간 이야기였고, 그 이후에 형과 나는 화려한 그래픽이니, 게임이니 하는 이야기도 하고 동네 슈퍼마켓 하는 이야기도 나눴다. 고시는 어려운 모양이었고, 나도 괜히 우울한 형의 마음을 훔쳐 본 것 같아 우중충했다. 집에 돌아가는 나를 배웅하는 형을 뒤로한 채, 나는 털털거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오늘 까지 계속 반복되는 대화는 역시 그 "로또"에 대한 것이었다. 운이란 그렇게 균형이 정해져 있는 존재는 아닐 터이다. 어떤 사람은 운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가 어느 사람들을 "탈랜트"라고 부르는 것이 극명하게 이러한 운의 불균형을 말해준다. 재벌 2세는 어떤가? "셀러브리티"들은 어떤가? 21세기 초반의 야심많은 20대라면 생각해봄직한, 김연아나 박태환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과 시기는 어떤가? 운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돌아보면 역시 그렇게 만만하게 움직일 수 있는 무게추도 아니다. 하지만 그 무게란 것은 우리 인생에 매우 깊게 침잠한다. 어떤 가정에 태어나는지. 일용직 홀아비 아래서 자란 아이도 있고, 강남 고층아파트에서 사업가와 교수 밑에서 자란 아이도 있다.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상속은 얼마나 받는지. 심지어 어떤 얼굴인지. 그리고 어떤 키인지. 어떤 체형인지까지. 운의 문제가 개입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노력'을 강조하는 우리네 이야기들. "운은 만들어가는 거다"라는 굳은 신념의 이면에는, 아마도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깊은 무력감이, 피로감이 자리해 있는 것 같다. III 그런데, 그토록 불균형함이 뚜렷한 우리네 인생에서, 형과 나는 왜 운에 대한 '균형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도 꺼낸 걸까? 형은 왜 응수했고, 나는 왜 그토록 쉽게 수긍했을까? 나는 곰곰이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동안 틈틈히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운의 문제가 우리 인생의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채 자라지 못한 젊은이여서, 아마도 이런 깊은 인생 전체에의 관조에는 익숙치 못하다. 사실은, 익숙치 못하다기보다도, 무언가 반발심이 쉽사리 치오른다. 인생이 이렇다, 고 하는 노인의 말마디가 때로는 지나치게 오만하고 고집스럽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운의 문제만으로 결정지어진다면,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가장 행렬에 불과하다고, 말하자면 우리의 땀과 피와 한 땀의 시간 등은 대략 결정지어져 버린다면, 대단한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일벌들'이라면, 그래서 혁명 이외에는 그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생각하건대, 아마도 사회주의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전히 가장일 뿐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게 재단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운'의 문제란, 인생에 비해서는 매우 단순하고, 그렇기 때문에, 보다 복잡한 인생 전체를 포획하지는 못한다는, 단순한 불가지론은, 그 겸양만으로도, 수용할 만 한 명제라고 생각한다. (쉼표가 많은 데 양해를 구한다.) IV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2009년 06월 28일
1. 惡의 문제는 삶에 편재하는 악에 대한 생각이다. 이 생각은, 어떤 성질인가 아니면 실체인가? 그것은 삶이라는 형태에 개입하고 짜여 지기 때문에, 실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성질이란 다른 실체에 대해 임시적인 효과에 그칠 뿐이며 가역적이라 할 것이지만, 하나의 실체란 실제 다른 실체들에 대해 비가역적이어서 영구적이라 할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즉 惡은 惡性이 아닌 惡 그 자체로서, 이는 삶이라는 구조를 전체적으로-소위 '유기적으로'- 변화시킨다.
2. 惡과는 구별할 개념으로서 罪의 개념이 있다. 罪는 역시 실체인가? 아니면 성질인가? 생각건대 죄 역시 개념과 실체 양자 모두의 측면을 지닌다고 하겠지만, 윤리학적이 아닌 인식학(인식철학)적 개념으로서 罪란 성질이라고 봄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罪란 惡에 대하여, 삶이라는 경험, 체제, 구조가 보이는 자가면역(auto-immune)반응과 같다. 즉 삶에 악이라는 요소가 섞이게 됨에 따른 일종의 (정신적) 알레르기 반응이라 할 것이 바로 죄를 인식하게 하는 기제(mechanism)라 할 수 있다. 따라서 惡이 전제되지 않은 罪 혹은 罪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죄책감이라는 준 감각적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죄라는 어떤 사정을 인식하게 되며, 나아가 이 죄라는 사정으로부터 惡의 실재가 추정된다. 3. 惡으로 인해 인간은 회의주의와 '不正의 正'이라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4. 惡은 外來하는 실체인가? 이 질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건대, 실제 惡이 인지되거나 실재한다고 간주되는 경우, 그 惡이란 확실히 외부세계(즉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것이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惡은 자신의 삶의 연속선상에서 외부 세계의 중립적인 사실에 대해 반응한 결정(crystal)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역시 악은 외래의 요소를 재료로 삼아 내부로서 동화한, 경험적 실존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경계는 모호하다. 5. 헤겔 식의 同化的 철학 방법에서 빠져나오면서 惡을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009년 05월 23일
그는 우리에게 순수한 정치를 보여줬다. 바보같을지언정, 참으로 순박하고 정겨운 정치였다. 인간다운 정치였다.
그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보여줬다. 대통령은 군주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는 보여주었다. 그의 말로는 이토록 소박하게 졌다. 나는 된통 얻어맞은 기분이다. 머리가 아찔하다. 2009년 05월 12일
1. 언론의 자유와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연방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또는 자유로운 신교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또한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사항의 교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 이는 미 연방의 수정헌법 제1조의 내용이다. 이른바 언론의 자유, 혹은 Freedom of Speech 는 자유주의의 핵심 명제이다. 번역어인 '언론'은 오해받을 때가 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말하고 논할 자유를 의미한다. 신문사 기자들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J.S. Mill은 On Freedom (<<자유론>>)에서 언론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 명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잇는 논리적 가교는, "진리"(혹은 진실)에 관한 굳은 믿음이다. 진리는 승리한다는 대전제를 통해서, 역으로 진리가 아닐 수 있는 주장들이 끼칠 수 있는 해악도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하나의 전제가 요구되는데, 이는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인정이다. 후자는 20세기를 지나 더욱 강하게 인지되었다. 즉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20세기 이념전쟁의 폐허 속에서 돋은 유일한 실익이었다고도 볼 것이다. 그러나 전자에 대한 믿음은 갈 수록 희미해져가고 있다. 오바마가 선언하는바, "Skepticism"과의 투쟁이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민주주의에 대한 적(敵)으로서, 21세기가 마주하는 문제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를 해결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윤리학적이고, 따라서 규범적이며, 무엇보다 법적인 문제로 우리 세대에게 대두되었다. 2. 언론의 자유는 제국주의적인가?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는, 사실상 뿌리가 없는 사상이다.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이론적 난국은 아마도 '언론의 자유'의 정당화 논변이 부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이른바 문자옥(文字獄)이 성행했던 문화를 지니고 있다. 글로 인한 화(禍)를 입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특히 정치에서 그러했다. 본래 서유럽 세계에서 언론의 자유란, 종교의 자유로부터 비롯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이론적 구성을 커피 하우스와 같은 '공론장'의 발전과정에서 찾는 하버마스의 경우에도 인정한다.* 종교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이념 갈등을 1차적으로 겪은 이후에, 각자의 종교를 서로 인내하기로 한 결과가 바로,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것이 바로 언론의 자유의 자양이라는 논의이다. 그러나 사실 언론의 자유의 뿌리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고, 이는 다시 기독교적인 토양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는 그 자체로 문제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언론의 자유는 서유럽 다수가 (거의) 모두 동의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기독교 사상이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아닌 국가들에 대해서는, 오늘날 언론의 자유가 서구가 아닌 국가들에게 괴리하듯이, 제국주의적인 개념이라고도 할 수있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1차적인 사상적 갈등에 대한 당시 서구 권력 내의 합의지점이었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이슬람과 서구의 충돌은,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문명의 충돌"로 파악되기 보다는, 오히려 구세기의 언론의 자유가 맞은 제 2차의 종교전쟁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적어도 세계는 21세기의 민주주의를 위해 내포하고 발전시켜야 할 새로운 개념의 언론의 자유를 구성해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사회가 언론의 자유를 토착화 시키는 양태야말로, 이론적으로는 21세기 민주주의의 새로운 구성에 있어 중요한 참고가 될 가능성이 있다. 3. 뒷말의 (한국) 문화는 무엇이며, 언론의 자유는 어떻게 새롭게 구성될 것인가? 한국은 이른바 험담, 뒷말을 처벌하는 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뒷말이, 말이, 언론이, 곧 권력으로 파악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언론을 권력으로 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문제이다. 우리는 말이 처벌받을 만큼 유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때문에, 말을 처벌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오랜 문화와 더불어, 남북 대립의 이념적 상처가 여전히 유효한 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유지되고 있다. 이른바 '뒷말'이란, 경제학적인 설명을 유비하자면, 결국 말(언론)에 대한 처벌이 낳은 말의 암시장이다. 즉 말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말이 가지는 유효한 힘은 여전하기 때문에 그 힘에 대한 욕구에서 발생하는 말의 논쟁장은 암시장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공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틀릴 수 있는 말'을 말로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공적인 부분에서는 추방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말의 자유가 없이, 민주주의가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언론의 자유를 민주주의에서 얼마나 구성적인 요소로, 즉 필수불가결하며 구조적으로 밀착한 요소로 보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말할 자유야말로, 사상의 자유와 함께 '자유'의 핵심요소를 이룬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문제를 최대한 융통성 있게 해결해내는 데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적 최전선이 펼쳐져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겠지만, 이러한 정리는 가능하겠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맞은 '언론의 자유' 문제는 단순히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역사적으로 21세기 민주주의가 맞을 새로운 '자유' 개념의 핵심 명제와 연관되리라는 것이고, 또한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9년 03월 03일
나는 한 때 비관주의를 신봉했다.
어린 시절, 나는 모든 인간이 이기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그 생각이 완전한 어떤 깨달음이라고 믿었다. 어떤 생각이든, 완전하지 않고 결국 일반론이란 거대한 폭력의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불 속의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소방관을 예로 들고는 했다. 소방관은 희생되었지만, 슬플 건 없어. 나는 말했다. 소방관은 결국 자기를 희생시키고 영광과 명예를 얻으려는 이기심으로 인해 죽었을 뿐이야, 그 삶의 선택에 대해 왜 우리가 대가를 지불해야 해. 나는 이렇게 차갑게 말하고는 했다. 부모도 마찬가지야. 나는 때로 말했다. 마음의 걸거침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려는 자신의 희망 때문일 뿐이야. 라고 되뇌었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는 강력한 정화의 불길은 대단히 소중하다. 가식과 위선을 혐오하는 나의 마음은 지킬 만 했다.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삼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언가에 대한 혐오는 완전한 반성이 아니다. 혐오로부터 탄생할 수 있는 발전이나 긍정성은 없다. 그리고 가식과 위선에 대한 분노는 어느덧 '위악僞惡'이 되어 나 스스로를 악마의 대변인이 되게금 만들었다. 나는 메피스토가 되고 있었다. 인간은 희망이라는 가면을 꼭 필요로 하는 동물인지도 모르겠다. 이 말에 함축한 많은 기름기를 나는 잊지 못한다. 부정하지도 못한다. 사람냄새나는 이 축축한 상황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나는 이 시대의 비관주의는 마지막으로 남은 낭만주의자들의 최후이며, 낭만의 석양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일그러진 붉은 빛으로 낭만은 그 꽃잎을 모두 내치고 있다. 낭만을 지키기에 너무 많은 가시를 몸에 찔리운 이들이, 붉은 가슴팍을 드러내면서 절규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보자고 생각한다. 위선일 수 있는 나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그래왔다. 믿어왔다. 적힌 그대로의 말을 믿어왔다. 나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교과서를 읽었다. 나의 학교는 나에게 매를 때렸고, 머리를 깎였다. 나의 선생은 나의 친구를 개 밟듯 밟았다. 나의 군대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나의 국가는 인구로 터져나가고 있다. 시장은, '사회'는 아귀들의 수라장이라 한다. 가난한 자들은 쇠막대기에 몸이 멍들었다. 나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부르고 싶다. 나는 부르기를 원한다. 내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고치고 싶다. 내가 나의 본 모습에 어울리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불만족스럽다. 나는 민주적이지 않다. 나는 폭력적이다. 나는 오직 이기적이다. 나는 오직 어리석다. 그러나 나는 이 모습에 만족하고 싶지 않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싶다. 나는 믿고 싶다. 인간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겸손의 미덕을 되찾아야 한다. 나는 어리석다고 외쳐도 괜찮지만, 무엇이든지 오만하게 고집하지는 않아야 한다. 인간은 아가페를 믿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저주 아래에 있다. 어쩌면 오직 나의 이 결함이, 공허함이, 혹은 이 헛헛한 결단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해 본다. 나의 무게가 아닌, 나의 가벼움에 나는 또한 기도한다. 비관주의는 나의 길이 아니다. 2009년 0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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