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9일
용산 형사1심 판결, "법원"과 "법"의 역할이 고민스럽다.

1. 판결의 역할은 무엇인가? 갈등은 현명하게 종결되었는가?


<법도 '용산'을 외면했다.> 경향신문은 어제 저녁 인터넷 신문 대문에 이러한 제호를 내걸었다.

"사법부에 절망한다." 피고인들과 변호사는 분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판의 본질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재판의 미덕은 설득을 통한 분쟁의 해결이다. 악다구니 받친 사람들을 차분하게 앉혀 놓고서, 합리적인 이유를 조목 조목 따져주는 것이다. 민사소송 뿐 아니라, 특히 형사재판이기 때문에 설득, 설복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형법의 목적은 단순히 피고인을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피고인이 뉘우치게 만들고 유사한 잘못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1) 피고인들의 죄는 존재한다.

 판결에 대해 법원, 사법부에게 "이유"가 있었다.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애쓴 아시아경제 신문기사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1심 판결 내용을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법원은 농성자들의 '특수공무집행 방해 치사상'ㆍ'업무방해' ㆍ'현주건조물 침입' 혐의 등 검찰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인정하고, 경찰 당국이 단순 민사분쟁에 특공대를 투입한 것은 정당한 조치였다고 판단했다."

법적으로 정리해 보면 피고인들의 각 죄(형법에서는 이를 '죄책'이라고 한다)는 다음과 같다.
  •  재개발 조합은 적법하게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피고인들이 건물을 무단으로 점거했다. "업무를 방해"한 죄인 것이다. 
  •  재개발 대상 건물이었지만 관리되고 있는 건물이었는데, 피고인들이 무단으로 건물에 침입했다. "현주건조물 침입"죄인 것이다. 
  •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화염병 등을 투척했고, 경찰공무원이 공무수행중에 상해를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특수공무집행 방해 하였고 그 과실로 사망이나 상해에 이른" 죄인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법문"에 비추어 판단하고, 그 결론으로서 '죄'를 인정하는 것은, 1차적인 법원의 역할이고 법원이 없는 죄를 있다고 하거나, 있는 죄를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원은 법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을 집행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밝혀지는 사실 자체를 법에 '포섭'하는 과정을 통해 죄책을 매길 수 밖에 없다.

(2) 그러나 양형은 어떠한가?

 하지만 양형의 측면에서라면 법원의 자유로운 활동의 폭이 넓어진다. 하지만 양형에서 법원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찰과 철거용역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무런 피해보상을 하지 않은데다 정치적 목적으로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등 범죄 후 정황도 좋지 않아 중형이 불가피하다"

 말하자면 죄도 있지만, 특히 그 '죄질'이 나쁘다고 법원은 피고인들을 단죄, 비난 하고 있는 것이다.

(3) 법원은 법에 대해 무슨 역할을 맡는가?

나는 이 판결에 대한 소개와 여러 분노와 갈등을 목격하면서, 법원의 역할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 법원은 사악한가?


법원은 법을 법대로 집행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1심 판결 이후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형태 변호사는 “법리만 따지면 99% 무죄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유죄가 나왔다”며 “사법부가 자기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밑줄은 필자)

 그러나 과연 이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99% 무죄로 확실했는가? 사법부는 법리를 완전히 곡해했는가?
 
 나는 이에 대해 '그것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사법부가 명백한 일을 그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99% 무죄일 사건이라면, 검찰의 기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우선 이러한 변호인의 감정적인 분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변호인들의 분노로부터 거리를 둔다고 해서, 법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판부는 "아무리 절박해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공무집행 중인 경찰을 향해 위험한 화염병을 던진 것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로 법치국가에서 용인될 수 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아마도 재판부의 생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 인용이 아닐까 싶다. 경찰은 법대로 집행했을 뿐이다. 재개발 조합도 법대로. 건축주도 법대로 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법을 어긴 것인가?" 이 참사의, 이 비극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법원은 그건 역시 법을 어긴 너희, 피고인들 아니냐는 답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절박해도, 법에 호소하라.는 논리를 세운 판결이었다. 불법을 보호해주지는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이다.

* 법원은 정의로운가? 혹은 현명했는가?

 재판부의 태도는 일견 이치가 맞는 것 같다. 많은 보수논조의 신문들 역시 이러한 태도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례로 국민일보는 제호로 "용산참사 중형선고… 폭력적 시위문화 ‘단죄’" 라고 말한다.

 법원이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체 사회와 그 속의 제도-강제력-으로서 '법'에 대한 역할을 맡지 않고,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사실 속에서만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우리 1심 법원은 왜 이런 참사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그러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시너'를 뿌려서 누가 '화재'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사실 문제는, 피고인들에게뿐 아니라 국민의 절대 다수에게(즉 공중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당황한 세입자나 전철연 소속원이 그랬을 수도 있고, 반대로 용역이 그러했을수도 있고, 경찰의 실수였을수도 있다. 게다가 용산참사의 경우, 그 책임소재는 검경의 수사기록 불공개와 함께 불분명하게 되었다.

 재판은 정말 무엇을 판단해야 했는가? 
 
 추운 겨울. 새벽. 경찰이 진압을 시작한다. 테러리스트 진압을 위해 훈련받은 경찰특공대가 공중에서 뛰어내린다. 전철연 및 시위대는 화염병과 새총으로 반격한다. 야만과 야만, 불법과 불법의 충돌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화염이 터져오르고,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고 다친다. 대체 이 비극은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나? 이 문제를 어디에서 부터 풀어나가야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는가? 

 똑바르게 물어서, 과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재판부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왜 그들을 망루로 올라갔는가?"
 법원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질문 없이, 앞 뒤의 사실을 모두 자르고. 단지 그날. 그 시점. 그 경찰의 공무와 그 용역업체의 행위 1, 2, 3번과. 그리고 화염병 투척 행위 1번, 2번, 3번. 피고인 갑 그리고 피고인 을. 의 "죄책을 논하라" 는 게 가능한가? 법원은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과연 가능한가? 과연 우리는 그 망루의 의미를 따지지 않고, 판결을 낼 수 있을 것인가?

 법원은 법을 만들 수 없다. 법은 입법자가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법원은 침묵할지언정, 불법을 말할 수는 없다. 법이란, 상식과 조리의 소산이며, 경험칙의 산물이다. 법(이른바 '法源')의 단말 하나하나. 즉 법전의 조항 하나하나는 입법자의 헐거운 작업에 의해 짜여졌지만, 그 사이를 엮어 내려가는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들은(이는 단순한 기계적 인과관계 판단은 아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 그 자체에서 그 근원을 끌어오는 단단한 것이다.

 법원은 법을 만들수는 없으나, 법을 적용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법원은 마땅히 넓게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 공판장의 의미란 아마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억울하고 갈등하고, 피와 죽음과 복수와 복수를 부르는 이 얽힌 관계에 대한, 한바탕의 한풀이가 바로, 재판이 아닐까? 너는 (억울한) 사실을 내게 말하라. 나는, 즉 법원은 '법'을 주리라. 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의 요청이 아닐까? 과연 현재 1심 판결의 '소극'으로서, 무엇이 만족될까? 법원은 입법자에게 가서 항의하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억울함과 갈등을 이처럼 칡뿌리처럼 얽혀 놓은 판결이, 판결 그 자체의 핵심적 미덕으로서 "현명함"에 이르렀는지 나는 의문이다.


 


2. 법원의 법에 대한 역할은 무엇인가? 먼저, 법은 공정한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문제는 '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권리금의 문제, 도시정비법 등 재개발 관련 법규들의 난맥상 문제 (이는 기사에서 자주 논해지는 바이다.), 건축의 고질적인 복잡한 2중 3중의 하도급 관계. 지나친 부동산 가격과 그를 통한 경제 부흥의 문제. 등등.

 결국 '법'은 사회와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강제력 있는 제도의 묶음이다. 그러나 사회에는 부정의와 악이 존재하고, 우리의 법도 그 모든 것들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법전, 즉 입법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法文은 부조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계속해서 다듬어 나가야 할 대상이겠지만, 궁극적으로 법이 약자의 편은 아니다.

 법에 대한 투쟁은 소중하다. 그것을 법원은 촉진까지는 아니어도,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입법자의 영역에 법원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하지만 법원이 잔혹할 수는 없고, 그 판결이 억울함을 남길수는 없다. 법원으로서는 고민이고 또 고민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법원은 법을 고양시키는 데 그 책임을 다 하면 될 뿐이라면. 우리의 법원은 단지 행정부나 입법부의 역할을 감시하고 있으면 될 뿐이다. 그들로 하여금, 법을 만들게 하면 된다. 국민으로 하여금, 입법자를 압박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대체 법원의 역할은 무엇인가?
 
 법원의 역할이 부정의한 법을 지킴으로써, 국민들을 분노케 만들고 입법부를 압박해 정의로운 법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법원의 역할은 "불의의 법이라도 그대로 고수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법원의 태도와 윤리인가? 법원은 사회에 대해 눈 감아도 괜찮은가? 나아가 법원은 법에 종속 될 뿐인가?

 궁극적으로 왜 우리는 법원의 재판을 허용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소수자, 약자, 그리고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원의 역할이 분명히 따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나는 법원의 역할은 '합리성'이라고 생각한다. 법학이 말하는 이른바 'Legal Mind'라는 것도 그것이라고 본다. 이치 있는 판단 그 자체가 바로 법원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 '이치' '조리' 는 단순한 재판의 부속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실을 법에 맞춰 나가기 위해 동원하는, '인과관계 판단'에 그치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시너통이 45도로 기울어져서, 확률상 그 시너가 1초 후에 떨어져서, 다시 가연성이 강한 물체여서, 옷깃이 스치는 '스파크'만으로도 점화하고 폭발할 수 있다는 등의. 이러한 판단은 기초적이고 하등한 논리학에 불과하다.

 진실한 '논리' '이치' '조리' 의 힘은, 그것이 부정의한 법조항(법문)을 정의로운 공판장 앞에서 적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데서 발휘된다. 그리고 그 힘은, 사회와 그 경험칙을 폭넓게 법해석에 적용할 때 기능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망루에 올라갈 수 밖에 없었는가?" 

 법원은 재판기계가 아니다. 300원을 넣으면 자판기 커피가 나오지만, 사실을 넣으면 재판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넣어도 넣어도, 법원은 더 넓은 사실을 스스로 탐구하고 묻고 대답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마땅하다. 법원은 책임을 전가하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다. 누가 문을 두드리면 겨우 빼꼼히 문을 열고서는 대답을 해주는 얼치기가 법원이어서는 곤란하다. 법원은 정의의 수호자여야 하고, 거리의 피난처로 자처해야 한다. 
 
3. 법원의 힘과 지혜

 법원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진정으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싸우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재판이 있는 것이고, 이 때문에 법원에게 '양형' 등의 폭넓고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재량'이 있는 것이다. 법원에게 힘이 주어진 까닭은 시너가 누구에 의해 불붙었는가를 따지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법원은 그 힘과 지혜로, 그 스스로 가능한 최대한의 시야 속에서 무엇이 진정한 갈등의 본질인지를 따지고. 논하고. 그리고 그 얽힌 실타래를 끊어서 모두가 회한의 그러나 승복의 눈물과 웃음을 흘리며 집에 돌아가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모두가 다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함이다. 용산참사에 대해, 우리 법원은 과연 모두에게 다시 행복할 기회를 주었는가? 피고인들에게 뿐 아니라, 경찰에게도. 용역에게도. 청와대에게도. 그 누구에게든지 말이다. 가만히 묻고 따져 볼 일이다.
 
*  한국 위키피디어의 용산참사(중립적인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항목은 여러 소개를 많이 해 주어서 참고가 되었음을 밝힌다.
by Meta-David | 2009/10/29 22:09 | | 트랙백 | 덧글(2)
2009년 10월 07일
낭만을 삶의 힘으로 삼기
삶이 치열하지만, 그 삶에 치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노트는 이에 대한 나의 작은 답변이다.

나는 바쁘고 꿈에서는 경쟁자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조급함은 의미 없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을 괴롭힌다.

나는 날카롭고, 사람을 다치기 쉬운 말을 내뱉는다. 이내 후회한다.

삶은 치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스치듯이 바라볼 이 뜨거운 삶을 나는 원했고 사랑한다.

하지만 삶이 나를 살게 하지는 않고 싶다.

어떤 조화나 균형. 이른바 '중용'의 문제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중용에 이르는 지혜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

나는 호메로스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서사의 행간에서 일상을 찾는다.

삶이 나에게 있어 즉자적이지 않기 위해서, 나는 삶을 대상화 하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구성력"있게 그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삶을 이야기로 나는 짜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을 스스로 구술해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 단계를 어느 이야기로 그리고 나는 그 주인공으로 등장해 보아야 한다.

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마도 내가 삶을 짜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생각한다.

...

추석에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펼쳐놓고 앉았었지만.
실존주의가 나의 답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속의 놀라움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고.
그 시기의 닮음에서도 많은 차이를 발견했다. 역시 시대는 변하고. 그 논리는 이름만 바꾸어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우리 곁에 있을 뿐이다.

...

Pat Metheny 의 Song for the Boys.
by Meta-David | 2009/10/07 19:13 | 문학, 노트 | 트랙백 | 덧글(3)
2009년 08월 15일
어느 여름밤의 기행.

 산책이란 굉장히 사치스러운 운동이다. 그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몸을 가꾸기 위해서는 좋은 피트니스 클럽에서 제대로된 트레드밀을 30분동안 달리는 편이 낫다. 정신 수양을 위해서도, 쌓인 책을 읽는 편이 옳다. 움베르토 에코가 말하듯이, 우리에게는 읽을 시간이 도무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책을 나섰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의 긴 노을을 여유있게 감상하면서 말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사는 동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안의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때부터, 사실 왠만한 일로는 학교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나에게는 학교 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이 다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나갈 때는, 그래도 나의 여행이 운 좋게 기회를 만난 셈이다. 나는 할 일이 있어 사회로 복귀했다는 태도로, 당당히 어깨를 들고서 지하철도 타고 사람들과 눈짓도 주고 받을 수 있다. <날개>에서 이상이 고백했던가. 올바른 목적을 지니고, 난 번화로를 내딛는다.

 하지만 산책. 이라는 이름의 목적 잃은 여행은, 매우 사치스럽고도 고독하다. 마치 잠시간의 목적 없는 휴가를 허락받는 해묵은 군인의 모양이다. 환영하는 이도 돌아갈 생각도 없다. 나는 순전한 관찰자가 되기 일수여서, 길 위에서 자칫 방황해버린다. 사람들과 눈짓을 나누기보다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내 속의 시커먼 경멸을 발견해 버린다.

 어쨋든 나는 다시금 사람들 사이로 내려가기로 했다. 무어- 짜라투스트라와 같이 행여나 내가 계시라는 묶음을 지니고서 이 山을 내려간 것도 아니다. 그저, 그저 걷기 위해 내려갔고. 보기 위해 시장이 있는 거리를 향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로 향하는 길에는 작은 산과, 그 산을 통해 있는 정말 짧고 작은 터널이 있다. 터널의 양 편으로 인도가 어설프게 마련되어 있는데, 나는 웅웅 거리며 내 곁을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음 때문에 소름이 끼친다. 뒤에서 다가오는 차가 내는 굉음이 작은 터널 속에서 울리다 보면, 흡사 무슨 탱크라도 나를 노리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어둠 저편에 있던 무슨 괴물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괴성인지도 모른다.

 무사히 터널을 통과하면 신세계이다. 터널은 참 매력적이어서, 나는 일부러 차들의 꾀죄죄한 소리를 굉음으로 상상하고, 마침내 나의 통과의례를 위한 고통으로 作爲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한 신세계라는 느낌. 터널을 지나고 나면, 이제 학교의 풍경이 일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아이들의 난동과, 주름이 깊게 파인 남자 여자들의 발걸음. 분주함은 혼란 속에서 흩날리는 풍경으로 펼쳐진다. 뿌옇다 못해서 흐리고 텁텁한 공기는, 매우 덥게 느껴진다. 여름 밤의 축축하고 뜨뜻한 대기가 그들의 코에서, 그리고 저 아줌마와 저 아이와 그리고 내 코를 통해 끊임없이 쉭쉭거리며 왔다 갔다 한다. 나는 순간 어떤 감정을-그리고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돈스럽다.

 터널을 나와 비스듬한 거리를 아래로 내려오면서, 나는 많은 집들을 본다. 더운 날씨에 어쩔 수 없이 집안까지 휑히 비취는 날이다. 저녁 시간이고 많은 이들이 집안에 머물고 있다. 어둡고 티비가 켜져 울룩둘룩 색이 변하는 창문들. 왠 사람들이 북적이며 술장단을 노니는 집안 풍경이 보인다. 집이 아닌, '집들'은 큰 콘크리트를 단위로 조그맣게 제 자리를 비집고 차지하느라 힘겹다. '아파트'

'아파트'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언젠가는 내가 살아왔던 '아파트'들을 소재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 '가든 빌라' '행운 아파트' 등의 속을 비춰보니, 어찌 피하지도 못할 어색함에 휩싸여, 내가 살아왔던 공간이 저들의 공간인가 라고 어지럽다.

 저 치열하고 뜨뜻한 생활의 콘크리트 투기장이여. 

 집들은 제 각기 어찌나 치열하게 제 자리를 찾아서 콘크리트, 아아 바위 덩어리들을 쌓고 또 파 왔던지. 그 속에 머무는 가족들은 얼마나 제 각기 행복하고 그리고 불행하던지. 그들은 빨래를 널고, 찌개를 끓이고, 아이를 키운다. 왠 아저씨 아줌마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서, 행복하다는 듯이 다가선다. 나는 어찌나 흠찟 놀라는지.

 대여섯 층이 되는 작은 '빌라' 라는 데 끼워진 집들은, 인간냄새로. 살 냄새로 가득했다.
 공기가 터질듯이 답답했다. 내 미래를 그릴 수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기 혐오로 가득해졌다.
 내가 저 공간을 통해 자라왔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의 뿌리는 콘크리트와 투쟁한 저 아파트와, 저 나이든 여자의 주름팍과 그 여자의 빨래와 그 쉰내 속에서. 그 여름날의 역겨움 속에서 자라왔다. 나는 다시 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이 질문만은 나에게 묘한 희망감과 또 다른 환멸을 안겼다.

 

 <시편>에서는, 거리 곳곳에서 지혜가 너를 부른다고 말한다. 나는 때로 거리전도사의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바로 이 '지혜'인가 하고 반문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때까지 그 구절에 대해 무슨 큰 회의를 품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이 거리에서, 나는 참 큰 의문과 반감을 가지고서는 여러번 힐난하듯이 물었다. 이 거리에서 도대체 무슨 지혜를 찾으라는 말인가. 이 생의 지옥 속에서, 이 삶의 투쟁들 속에서 이 낱낱한 생활의 일순 일순의 땀내 속에서 무슨 지혜를 도대체 내게 목도하라는 말인가. 하고 나는 나를 향해서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을 장저와 걸닉에 반대하는, 공자에게서 길어 낼 것인가?
 우리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고 공자를 변호했듯이. 나도 이 거리의 지혜라는 것을 변호할 것인가? 변호할 수 있는가?
 이 거리의 삶은 지혜에 있어서 무죄인가?

 번잡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다시 번뇌같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치를 떨면서, 발길을 옮기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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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ta-David | 2009/08/15 22:44 | 문학, 노트 | 트랙백 | 덧글(2)
2009년 08월 05일
20대에게 희망은 있다

 <너희에게 희망은 없다> 충남대학교 신문 6월 8일자에 기고된 김용민 교수의 칼럼은 많은 반향을 몰고 왔다. 칼럼의 요지는 "너희(20대)처럼 처신하면 밥되기 딱 좋다" 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명박이 너희를 무시하지, 등록금 공약도 안 지키고.'라는 것이다.
 
 나아가 김용민 교수는 "이미 너희(20대)는 뭘 해도 늦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지금 10대에게 큰 기대를 건다."는 마무리는 20대에 대한 실망과 질책의 감정을 보여준다. 어쩌면 '절망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동네북' 돼버린 20대를 위한 변명>은 83년생 한윤형 기자가 김용민 교수의 칼럼에 답하는 모양새로 오마이뉴스에 기고된 8월 4일자 기사이다. 한윤형 기자는 "그래도 20대에게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비록'' 20대에는 "활동가"가 없지만, 그래도 20대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성하리라'라는 것일까?

 그러나 20대에 대한 김용민 교수의 의견은 물론이거니와, 83년생 한윤형 기자의 절박한 '변명'은 20대를 올바로 파악한 결과가 아니다. 한윤형 기자가 20대를 '비판이 아닌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은 얼핏 현명한 답변인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심각한 잘못이 있다.

 첫째로 김용민 교수의 기고문은 20대에 대한 비판도 비평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용민 교수는 20대에 대한 자신의 실망을 담아서 단지 '비난'을 가했을 뿐이다. 둘째로 한윤형 기자는 20대를 비평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기사는 20대를 제대로 비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IMF 시대를 거친 20대의 보수화가 사실 '보수화'나 '우향우'라기 보다는, '열린우리당의 몰락'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 점에서는 타당했다고 본다. 

이에 아래에서는 필자 나름대로 김용민 교수의 비난에 답해보며, 한윤형 기자의 의견을 보충해보고자 한다.

 과연 10대가 구세주일까?

 김용민 교수는 촛불을 일으킨 10대가 나이가 들어 다시 위대한 민주당의 정신을 살릴 것이라고 믿는가? 김용민 교수는 지금 20대에게 '데모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0대에게 희망은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10대가 지금의 20대 대신 5년, 10년 뒤에 화염병을 386같이 들고 거리로 뛰쳐나올까? 과연 2020년 2030년에 제2, 제3의 6월항쟁이 지금의 10대에 의해 일어날까? 

 필자는 김용민 교수가 과연 현실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그러나 이 의문 이전에, 그 의견(비난)은 건전하지도 않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대결'과 '항쟁'으로 점철된 사회는 살기 좋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10대가 20대의 대안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대가 10대의 전조일 뿐이다. 10대는 20대가 될 것이고, 20대의 정치적 성향은 10대에게도 거의 다름없이 연속될 것이다. 김용민 교수의 10대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마치 압제받는 민중이 구세주를 찾는 것과 같아서 안타깝다. 하지만 '혹세무민'의 네 글자를 피해가기 어려운, 그의 의견은 지식인으로서 자격미달의 맹종이 되지 않을까.

 이른바 '20대 강아지론(개XX론)'-20대 민중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라

 생각해보면 이 '강아지론'의 발상과 출처는 이명박 현 대통령에게 권력을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좌파의 변명이다. 이는 논리라기보다는, 구차한 절규에 가깝다. 하지만 지난 정권의 유산이 부당하게 '박해'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민주적 정권교체의 결과이다. 민주주의는 늘 정권의 교체를 평화롭게 보장하는 데서 시작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면 좋든 싫든 민중의 대의(大義)가 현 정권에 들어 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읽는 기본이고 원칙이다.

 다수 국민은(최소한 다수 20대는, '대다수'라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노동자 운동에 절대적 동감을 표하지 않는다. 실제로 노동자 운동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절대적 정의'가 아니다. 

 다수 국민은 인권도 중요하지만 경제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합법적인 시위가 아닌 불법적인 시위를 진압하는 일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불행하지만, 필요하다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 반면 김용민 교수는 '불법집회'를 가지 않겠다는 자신의 학생들이 '까칠'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 20대에게 김용민 교수는 무엇을 바라는가? 쌍용차 공장의 대치 상황이 21세기 20대 VS 이명박 정권 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올바른 대한민국의 미래란 말인가? (필자는 쌍요차 대치 상황, 노사정 어느 편을 드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또한 좌파는 이명박 정권이 민중을 '속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라면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은 민중에게 언제나 신실했는가? 깨끗했는가? 도덕성 경쟁으로 나갈 때 과연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결코 이명박이 좋다거나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명박을 비판하길 원한다면, 제대로 비판하라는 것이다. 정치적 식견과 건전한 판단(;良識)을 갖추고 비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꿎은 20대를 굴욕감의 볼모로 삼고 함부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20대에게 감히 '희망이 없다'고 모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니 팔뚝 굵다'고 하는 김용민 교수의 칼럼은 '글'이라기보다는 '욕설'로 읽힌다. 그 칼럼은 현 정국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20대 민중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로 풀어낸 엘리트주의자의 절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를 규정짓지 말라. Do Not Judge Anybody- 민주주의로 충분하다.

  이미 한국 사회는 다원화되었다. 공장노동자들이 여성을 옹호할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성소수자를 옹호할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가 환경운동가를 지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이 우파가 되어 해병대를 지지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 여성은 똑똑할 수 있다-이를 인정하라. 성소수자가 새만금 사업을 지지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 성소수자는 '개새끼'라거나 '딱 밥되기 좋다'고 비난받을 만큼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는 우파와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 자본가와도 '연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정짓고, 규정짓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만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제 각기의 이해관계자들이다. 

 삼성의 이사진은 삼성의 비노조 정책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불법적 노조탄압이 사실이라면,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 말에 대한 허용과 불허용이 바로 법의 역할이다.)  반대로 현대차의 노동자 조합은 자신의 업무 처우에 대해 격렬하게 교섭할 사항이 있을 것이다. 여성은 자신이 유급의 육아휴직을 마땅히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투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의 장병은 불가피한 징병제 하에서 제대로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성산의 도롱뇽을 옹호하는 말도, 반대로 고속철도의 빠른 개통이 중요하다는 말도 모두 존재하고, 존재해서 타협에 이르러야 한다. 한국은 이미 다수의 이해당사자들로 꽉 차 있다. 그리고 이들이 합법적으로 말 할 수 있도록, 타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 '법'과 '정치'가 할 일이다. 어떤 이해당사자를 '개새끼'라고 규정짓고 적으로 삼는 게 '정치'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20세기 초 소비에트와 나치스의 정치였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21세기 한국의 정치는 아니다. 더군다나 한 세대를 모조리 비난하는 건, 언제나 그러했듯이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비난'일 뿐이다.

20대와 21세기 플래쉬몹 정치는 살아있다

 정치는 누군가를 규정짓거나 비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20대는 다원화하는 한국 사회의 일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20대에는 좌도 우도 풍부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20대의 좌'라고 해서 무조건 새만금 사업에 반대하거나 현대차 노조를 옹호하지 않는다. 비폭력적이지만 남성우월주의적으로 보이는 '20대'들이 많을 수 있다. 20대는 좌와 우의 경계를 넘나들며, 규정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합법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움직여 나갈 뿐이다.

 불법시위는 나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좋은 품질의 먹을 거리'에 대한 위협에는 항거한 것이 바로 촛불시위의 본질이었다고 생각한다. 10대가 방아쇠를 당겼는지를 모르겠지만, 촛불시위가 불타오른 데는 모든 민중의 힘이 있었다. 그 곳에는 유모차를 이끌고 나온 엄마와 아빠가 있었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었고, 디카를 든 20대들도 당당히 있었고, 그리고 펀드를 걱정하는 30대, 40대들도. 50대들도 풍부하게 있었다. 촛불시위는 좌파의 산물이 아니다. 20대가 좌파의 '개XX'가 아니듯이, 촛불시위도 좌파의 훈장이 아니다. 

 민중의 먹거리에 대한 플래쉬 몹(flash mob). 그것이 바로 촛불시위였다. 21세기 정치적 '연대'의 의미를 이보다 더 잘 드러내 주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원주의 속의 연발하는 플래쉬 몹. 그것이 정치이다. 우리 20대는 그 네트워크 속에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단단히 잘 붙어 있다. 나는 20대가 자랑스럽다. 20대에게 희망은 있다.

by Meta-David | 2009/08/05 01:23 | | 트랙백 | 덧글(2)
2009년 07월 09일
행복과 운의 문제에 대하여
I

 아는 선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21세기 초반의 대학가 사람들 답게 "로또"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디오-슈페리움 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오피스텔이 '우월'하더라고 전언(傳言)하면서, 이케아(IKEA) 가구를 채워 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형은, 정겹게도

"로또에 당첨된다면 인생의 모든 운을 거기에 써버리는 거 아닐까?"라는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똑똑한 척 재느라고 다시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운'이라는 거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다른 운들은 모두 재물운으로 바꿔볼래."하고 '운'의 종류를 云云했다.

형은 "건강운까지도 말야?"라고 응수했고, 역시 그건 무리겠지. 하고 나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II

 잠시 지나간 이야기였고, 그 이후에 형과 나는 화려한 그래픽이니, 게임이니 하는 이야기도 하고 동네 슈퍼마켓 하는 이야기도 나눴다. 고시는 어려운 모양이었고, 나도 괜히 우울한 형의 마음을 훔쳐 본 것 같아 우중충했다.

 집에 돌아가는 나를 배웅하는 형을 뒤로한 채, 나는 털털거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오늘 까지 계속 반복되는 대화는 역시 그 "로또"에 대한 것이었다.

운이란 그렇게 균형이 정해져 있는 존재는 아닐 터이다. 어떤 사람은 운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가 어느 사람들을 "탈랜트"라고 부르는 것이 극명하게 이러한 운의 불균형을 말해준다. 재벌 2세는 어떤가? "셀러브리티"들은 어떤가? 21세기 초반의 야심많은 20대라면 생각해봄직한, 김연아나 박태환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과 시기는 어떤가?

운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돌아보면 역시 그렇게 만만하게 움직일 수 있는 무게추도 아니다. 하지만 그 무게란 것은 우리 인생에 매우 깊게 침잠한다. 어떤 가정에 태어나는지. 일용직 홀아비 아래서 자란 아이도 있고, 강남 고층아파트에서 사업가와 교수 밑에서 자란 아이도 있다.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상속은 얼마나 받는지. 심지어 어떤 얼굴인지. 그리고 어떤 키인지. 어떤 체형인지까지. 운의 문제가 개입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노력'을 강조하는 우리네 이야기들. "운은 만들어가는 거다"라는 굳은 신념의 이면에는, 아마도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깊은 무력감이, 피로감이 자리해 있는 것 같다.

III

그런데, 그토록 불균형함이 뚜렷한 우리네 인생에서, 형과 나는 왜 운에 대한 '균형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도 꺼낸 걸까? 형은 왜 응수했고, 나는 왜 그토록 쉽게 수긍했을까? 나는 곰곰이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동안 틈틈히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운의 문제가 우리 인생의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채 자라지 못한 젊은이여서, 아마도 이런 깊은 인생 전체에의 관조에는 익숙치 못하다. 사실은,

익숙치 못하다기보다도, 무언가 반발심이 쉽사리 치오른다. 인생이 이렇다, 고 하는 노인의 말마디가 때로는 지나치게 오만하고 고집스럽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운의 문제만으로 결정지어진다면,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가장 행렬에 불과하다고, 말하자면 우리의 땀과 피와 한 땀의 시간 등은 대략 결정지어져 버린다면, 대단한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일벌들'이라면, 그래서 혁명 이외에는 그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생각하건대, 아마도 사회주의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전히 가장일 뿐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게 재단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운'의 문제란, 인생에 비해서는 매우 단순하고, 그렇기 때문에, 보다 복잡한 인생 전체를 포획하지는 못한다는, 단순한 불가지론은, 그 겸양만으로도, 수용할 만 한 명제라고 생각한다. (쉼표가 많은 데 양해를 구한다.)

IV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by Meta-David | 2009/07/09 23:29 | 문학, 노트 | 트랙백 | 덧글(2)
2009년 06월 28일
惡의 문제
 1. 惡의 문제는 삶에 편재하는 악에 대한 생각이다. 이 생각은, 어떤 성질인가 아니면 실체인가? 그것은 삶이라는 형태에 개입하고 짜여 지기 때문에, 실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성질이란 다른 실체에 대해 임시적인 효과에 그칠 뿐이며 가역적이라 할 것이지만, 하나의 실체란 실제 다른 실체들에 대해 비가역적이어서 영구적이라 할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즉 惡은 惡性이 아닌 惡 그 자체로서, 이는 삶이라는 구조를 전체적으로-소위 '유기적으로'- 변화시킨다.

 2. 惡과는 구별할 개념으로서 罪의 개념이 있다. 罪는 역시 실체인가? 아니면 성질인가? 생각건대 죄 역시 개념과 실체 양자 모두의 측면을 지닌다고 하겠지만, 윤리학적이 아닌 인식학(인식철학)적 개념으로서 罪란 성질이라고 봄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罪란 惡에 대하여, 삶이라는 경험, 체제, 구조가 보이는 자가면역(auto-immune)반응과 같다. 즉 삶에 악이라는 요소가 섞이게 됨에 따른 일종의 (정신적) 알레르기 반응이라 할 것이 바로 죄를 인식하게 하는 기제(mechanism)라 할 수 있다. 따라서 惡이 전제되지 않은 罪 혹은 罪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죄책감이라는 준 감각적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죄라는 어떤 사정을 인식하게 되며, 나아가 이 죄라는 사정으로부터 惡의 실재가 추정된다.

 3. 惡으로 인해 인간은 회의주의와 '不正의 正'이라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4. 惡은 外來하는 실체인가? 이 질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건대, 실제 惡이 인지되거나 실재한다고 간주되는 경우, 그 惡이란 확실히 외부세계(즉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것이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惡은 자신의 삶의 연속선상에서 외부 세계의 중립적인 사실에 대해 반응한 결정(crystal)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역시 악은 외래의 요소를 재료로 삼아 내부로서 동화한, 경험적 실존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경계는 모호하다.

 5. 헤겔 식의 同化的 철학 방법에서 빠져나오면서 惡을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by Meta-David | 2009/06/28 23:20 | 문학, 노트 | 트랙백 | 덧글(0)
2009년 05월 23일
노무현 씨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는 우리에게 순수한 정치를 보여줬다. 바보같을지언정, 참으로 순박하고 정겨운 정치였다. 인간다운 정치였다.
그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보여줬다. 대통령은 군주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는 보여주었다.

그의 말로는 이토록 소박하게 졌다. 나는 된통 얻어맞은 기분이다. 머리가 아찔하다.


by Meta-David | 2009/05/23 16:41 | 문학, 노트 | 트랙백 | 덧글(0)
2009년 05월 12일
언론의 자유와 뒷말(Gossip)의 문화는 조화 가능한가?
1. 언론의 자유와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연방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또는 자유로운 신교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또한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사항의 교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

 이는 미 연방의 수정헌법 제1조의 내용이다.  

 이른바 언론의 자유, 혹은 Freedom of Speech 는 자유주의의 핵심 명제이다.

번역어인 '언론'은 오해받을 때가 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말하고 논할 자유를 의미한다. 신문사 기자들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J.S. Mill은 On Freedom (<<자유론>>)에서 언론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 명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잇는 논리적 가교는, "진리"(혹은 진실)에 관한 굳은 믿음이다. 진리는 승리한다는 대전제를 통해서, 역으로 진리가 아닐 수 있는 주장들이 끼칠 수 있는 해악도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하나의 전제가 요구되는데, 이는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인정이다.

 후자는 20세기를 지나 더욱 강하게 인지되었다. 즉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20세기 이념전쟁의 폐허 속에서 돋은 유일한 실익이었다고도 볼 것이다. 그러나 전자에 대한 믿음은 갈 수록 희미해져가고 있다. 오바마가 선언하는바, "Skepticism"과의 투쟁이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민주주의에 대한 적(敵)으로서, 21세기가 마주하는 문제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를 해결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윤리학적이고, 따라서 규범적이며, 무엇보다 법적인 문제로 우리 세대에게 대두되었다.

2. 언론의 자유는 제국주의적인가?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는, 사실상 뿌리가 없는 사상이다.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이론적 난국은 아마도 '언론의 자유'의 정당화 논변이 부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이른바 문자옥(文字獄)이 성행했던 문화를 지니고 있다. 글로 인한 화(禍)를 입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특히 정치에서 그러했다.

 본래 서유럽 세계에서 언론의 자유란, 종교의 자유로부터 비롯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이론적 구성을 커피 하우스와 같은 '공론장'의 발전과정에서 찾는 하버마스의 경우에도 인정한다.* 종교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이념 갈등을 1차적으로 겪은 이후에, 각자의 종교를 서로 인내하기로 한 결과가 바로,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것이 바로 언론의 자유의 자양이라는 논의이다.

 그러나 사실 언론의 자유의 뿌리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고, 이는 다시 기독교적인 토양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는 그 자체로 문제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언론의 자유는 서유럽 다수가 (거의) 모두 동의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기독교 사상이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아닌 국가들에 대해서는, 오늘날 언론의 자유가 서구가 아닌 국가들에게 괴리하듯이, 제국주의적인 개념이라고도 할 수있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1차적인 사상적 갈등에 대한 당시 서구 권력 내의 합의지점이었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이슬람과 서구의 충돌은,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문명의 충돌"로 파악되기 보다는, 오히려 구세기의 언론의 자유가 맞은 제 2차의 종교전쟁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적어도 세계는 21세기의 민주주의를 위해 내포하고 발전시켜야 할 새로운 개념의 언론의 자유를 구성해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사회가 언론의 자유를 토착화 시키는 양태야말로, 이론적으로는 21세기 민주주의의 새로운 구성에 있어 중요한 참고가 될 가능성이 있다. 

3. 뒷말의 (한국) 문화는 무엇이며, 언론의 자유는 어떻게 새롭게 구성될 것인가?

 한국은 이른바 험담, 뒷말을 처벌하는 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뒷말이, 말이, 언론이, 곧 권력으로 파악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언론을 권력으로 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문제이다. 우리는 말이 처벌받을 만큼 유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때문에, 말을 처벌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오랜 문화와 더불어, 남북 대립의 이념적 상처가 여전히 유효한 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유지되고 있다.

 이른바 '뒷말'이란, 경제학적인 설명을 유비하자면, 결국 말(언론)에 대한 처벌이 낳은 말의 암시장이다. 즉 말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말이 가지는 유효한 힘은 여전하기 때문에 그 힘에 대한 욕구에서 발생하는 말의 논쟁장은 암시장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공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틀릴 수 있는 말'을 말로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공적인 부분에서는 추방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말의 자유가 없이, 민주주의가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언론의 자유를 민주주의에서 얼마나 구성적인 요소로, 즉 필수불가결하며 구조적으로 밀착한 요소로 보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말할 자유야말로, 사상의 자유와 함께 '자유'의 핵심요소를 이룬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문제를 최대한 융통성 있게 해결해내는 데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적 최전선이 펼쳐져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겠지만, 이러한 정리는 가능하겠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맞은 '언론의 자유' 문제는 단순히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역사적으로 21세기 민주주의가 맞을 새로운 '자유' 개념의 핵심 명제와 연관되리라는 것이고, 또한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by Meta-David | 2009/05/12 20:39 | | 트랙백 | 덧글(0)
2009년 03월 03일
비관주의에 맞서
나는 한 때 비관주의를 신봉했다.

어린 시절, 나는 모든 인간이 이기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그 생각이 완전한 어떤 깨달음이라고 믿었다. 어떤 생각이든, 완전하지 않고 결국 일반론이란 거대한 폭력의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불 속의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소방관을 예로 들고는 했다. 소방관은 희생되었지만, 슬플 건 없어. 나는 말했다. 소방관은 결국 자기를 희생시키고 영광과 명예를 얻으려는 이기심으로 인해 죽었을 뿐이야, 그 삶의 선택에 대해 왜 우리가 대가를 지불해야 해. 나는 이렇게 차갑게 말하고는 했다.

부모도 마찬가지야. 나는 때로 말했다. 마음의 걸거침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려는 자신의 희망 때문일 뿐이야. 라고 되뇌었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는 강력한 정화의 불길은 대단히 소중하다. 가식과 위선을 혐오하는 나의 마음은 지킬 만 했다.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삼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언가에 대한 혐오는 완전한 반성이 아니다. 혐오로부터 탄생할 수 있는 발전이나 긍정성은 없다. 그리고 가식과 위선에 대한 분노는 어느덧 '위악僞惡'이 되어 나 스스로를 악마의 대변인이 되게금 만들었다. 나는 메피스토가 되고 있었다.

인간은 희망이라는 가면을 꼭 필요로 하는 동물인지도 모르겠다.
이 말에 함축한 많은 기름기를 나는 잊지 못한다. 부정하지도 못한다.
사람냄새나는 이 축축한 상황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나는 이 시대의 비관주의는 마지막으로 남은 낭만주의자들의 최후이며, 낭만의 석양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일그러진 붉은 빛으로 낭만은 그 꽃잎을 모두 내치고 있다. 낭만을 지키기에 너무 많은 가시를 몸에 찔리운 이들이, 붉은 가슴팍을 드러내면서 절규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보자고 생각한다.
위선일 수 있는 나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그래왔다. 믿어왔다. 적힌 그대로의 말을 믿어왔다.

나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교과서를 읽었다. 나의 학교는 나에게 매를 때렸고, 머리를 깎였다. 나의 선생은 나의 친구를 개 밟듯 밟았다. 나의 군대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나의 국가는 인구로 터져나가고 있다. 시장은, '사회'는 아귀들의 수라장이라 한다. 가난한 자들은 쇠막대기에 몸이 멍들었다. 나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부르고 싶다. 나는 부르기를 원한다. 내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고치고 싶다. 내가 나의 본 모습에 어울리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불만족스럽다. 나는 민주적이지 않다. 나는 폭력적이다. 나는 오직 이기적이다. 나는 오직 어리석다.

그러나 나는 이 모습에 만족하고 싶지 않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싶다. 나는 믿고 싶다.

인간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겸손의 미덕을 되찾아야 한다. 나는 어리석다고 외쳐도 괜찮지만, 무엇이든지 오만하게 고집하지는 않아야 한다.

인간은 아가페를 믿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저주 아래에 있다.
어쩌면 오직 나의 이 결함이, 공허함이, 혹은 이 헛헛한 결단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해 본다.
나의 무게가 아닌, 나의 가벼움에 나는 또한 기도한다.

비관주의는 나의 길이 아니다.
by Meta-David | 2009/03/03 23:20 | 문학, 노트 | 트랙백 | 덧글(1)
2009년 02월 27일
이명박은 진정한 보수주의자인가?



최근 국가가 어렵다. 어려울 수록 "지키는 정치"는 정말 중요하다. 지금은 굳건하게 국민 모두를 껴안고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하는 단결의 정치가 중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이 위기에 처한 우리의 총력전이 실로 시급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자유주의는 단결의 정치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정치는 진정한 보수의 "지킴"(守)이나 "책임(保)"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경제가 어려울 수록 보수주의는 진정한 빛을 발한다. "보수"는 언제나 본질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되돌아보기를 요구한다. 반성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과거에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면, 해 낼 만한 잠재력이 있다면, 그러한 가능성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되물어보도록 한다.

보수주의는 건전한 전통을 다시 확립하고 그 힘에 기대어 국론을 다함께 모을 때- 여론을 껴안을 때- 막강한 힘을 끌어낸다. 세계 제 2차대전 당시, 유럽 대륙이 모두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오직 영국이 힘겹게 나치 독일에 저항하고 있었다. 런던에서의 끊임없는 공습경보는 유명하다. 처칠의 보수주의는 이러한 혼란에서 위대한 영국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군사독재에 좌익 세력이 맞서 싸운 민주화 항쟁의 역사는 보수주의를 이른바 "수구꼴통"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현재 필요한 것은 그 "수구꼴통"이 진정한 보수주의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현재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 보수주의의 조력은 시급하고 중요하다. 그리고 진정한 보수주의의 힘은, 그것이 위선이나 가식이 아닌 본질에 해당하는 "좋은 가치-덕목(Virtue)"을 추구할 때 가능하다. 


보수주의는 개인주의나 이기적인 기회주의가 아니다. 보수는 자유로운 시장과 경쟁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지만, 그 핵심은 "공정" "정직" 그리고 "성실"이라는 덕목을 향한 것이다. 우리의 진보는 보수를 "수구꼴통"으로 즉, 오직 이기(利己)를 위해 영혼을 파는 부도덕한 자본가로 비난한다. 오늘날의 보수가 진보로부터 배우고 나아가 한 단계 비상하기 위해서는, 이 비판에 주목해야 한다.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는 마땅히 진보보다 더욱 강력한 "德"이어야 한다.

보수주의자는 정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킬 줄 아는 명예를 숭상하는 자이다. 보수주의자는 인간 내면에 있는 진眞, 선善, 미美가 자유를 통해 최상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의 영혼에 그 어떤 굴레도 씌우길 거부한다. 교육이, 법률이, 나아가 정치가 "직접 인간을 규율"하지 않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자유"야말로 최고로 소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잘못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유"를 통해 인간과 그 사회가 최고의 덕(Virtue)에, 최고의 "좋음"에 이를 수 있다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보수주의의 신념이다.


이제 다시 이명박 정권의 보수주의를 살펴보자면, 그것은 허울뿐인 보수주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은 학생들로 하여금, 집단 일제고사를 통과하게 만들고 그를 통해 "획일화"한 교육을 더욱 강화하려고 한다.
이명박 정권이 생각하는 창의성은 어디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시험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던 몇몇 선생님과 학생의 "자유"는 이명박 정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정직. 해고. 정학으로 이어진 처벌은 가혹했고, 교육부는 부패한 혐의의 수장에 의해 썩어들고 있다. 학생의 미래를 진정 가꾸어 나가기 위해, 학생의 실력이 평가받아야 한다면, 마땅히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평가가 "자유롭게" 보장되었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길이 옳았다. 이래서야 이명박 정권이 생각하는 교육은 박정희-전두환 군부의 낡고 독재인 어리석은 교육이지, 결코 21세기 민주한국에 걸맞는 진정한 보수주의적 교육은 도무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약자인 노동자와 청년층의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이를 통해 어려운 경제를 견뎌 보자고 말한다.(소위 잡 셰어링Job Sharing 정책) 그러나 그 이면에 선 대기업의 CEO들은 어떤가? 이명박 씨 스스로가 봉직했던 현대건설의 임원들은, 그리고 재벌들은, 삼성의 3세 이재용씨와 같이 전환사채라는 편법적인(半-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재산을 그대로 상속받은 자들은, 그리고 강남 땅투기를 통해 혐오스럽도록 부도덕하고 실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지닌 일부 땅부자들은(아파트를 수십 또는 100채가 넘게 소유하고 온갖 대출을 받는다는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또한 무엇을 요구받고 있는가. 도대체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보수라는 자들에게, 바로 그 보수의 지도자로서 이명박 씨(혹은 "대통령")는 무엇을 "이끌고 있는가"? 그들에게서 진정한 희생의 정신을 이끌어내지 않고서, 보수가 진정성 있다 말할 수 있는가? "내 돈은 내꺼, 니 돈도 내꺼. 우리가 어려우니까 너는 희생하도록 하고, 나는 더 잘 먹고 살거야."라는 따위가 도대체 현재의 이명박 정부의 정책과 얼마나 다른가?
국민과 정권은 물어보고 따져볼 일이다.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 정권만큼, 혹은 거의 확실히 노무현 전(前) 정권 이상으로 국론을 분단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진정한 보수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가? 타인의 정치를 비난하기 전에, 자신의 교만함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의 본질과 진정성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질문하고 있는가? 이명박 씨는 자신이 말하듯 대한민국의 CEO로서 책임을 다하고 업무하고 있는가? 업무하고 있다면, 그 책임은 어느 정도의 무게인가? 진정 폭넓게 듣고 토론하고 고민하고, '정책'에 문자 그대로 피와 땀을 새기고 있는가?

1년이 지났다. 그러나 국민 과반수는 아직까지 이명박 대통령과 그 측근 정권을 신뢰하지 않는다.

CEO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이라는 사원을 해고할 수는 없다는 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국민은 정권의 부하직원이 아니고, 코스트(cost)로 구조조정할 대상도 아니며, 효율성으로 재단-평가-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국민은 우리 모두의 가족이며 이웃이다. 그 속의 그 누구라도 이 난국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2009년 한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해 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며, 이명박 정권의 "수구"주의가 맞닥뜨린 위기, 도전이며 어쩌면 한계이다.

by Meta-David | 2009/02/27 01:49 |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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